입력2024.05.14. 오전 10:01
불기 2568년 부처님오신날(15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식품기업들이 사찰음식에 주목하고 있다. 사찰음식은 절에서 스님들이 먹는 수행식이다. 오신채(달래·마늘·부추·파·흥거)와 육식을 배제하고, 식물성 재료를 배합해 조리한다. 최근 세계 식음료(F&B)업계에는 자연주의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동물성 단백질 양은 줄이고 식물성, 즉 채식을 늘리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사찰음식이 이 트렌드에 꼭 맞는 채식의 정수라고 평가한다. 식품업계 역시 사찰음식이 비건(vegan·적극적인 채식주의) 식단이나 식물성 건강식단을 추구하는 시장 흐름에 부합한다고 보고 관련 제품을 줄지어 내놓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일대에서 열린 연등회 전통문화마당에서 시민들이 CJ제일제당의 사찰식 팥죽을 구입하고 있다. /뉴스1 14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CJ제일제당은 지난 10일 대한불교조계종 사업지주회사 도반HC와 공동 개발한 사찰식 팥죽과 꽈리고추 식물성 장조림을 선보였다. 불교에서 팥은 복을 부르고 액운을 물리치는 식품이다. 절에서는 일반적인 팥죽과 달리 오곡(팥·현미·수수·찰보리쌀·차좁쌀)을 사용한다. 사찰식 팥죽은 설탕도 넣지 않아 대체로 심심하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오신채(달래·마늘·부추·파·흥거)꽈리고추 식물성 장조림은 불교에서 승려들이 먹는 걸 금지하는 고기 대신 콩고기를 사용했다. 양념에도 오신채 대신 다른 채소와 천연 조미료를 사용했다. CJ제일제당은 “조계종과 사찰음식에 담긴 문화적 의미와 맛을 살리기 위해 스님들 조언을 받았다”며 “올해 죽이나 다과 제품을 중심으로 사찰음식 라인업을 늘리고, 이 제품들을 공양 문화나 템플스테이 굿즈(관련 상품)로 활용할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신세계푸드는 지난 12일 사찰식 베이커리 신제품을 내놨다. 연잎찰파이와 연꽃단팥빵 2종이다. 신세계푸드에 따르면 이 파이와 빵은 우유나 버터, 계란을 사용하지 않는다. 연잎찰파이는 연잎가루를 사용해 만들었고, 연꽃단팥빵은 백년초 가루와 연꽃 씨앗에 해당하는 연자를 갈아 넣어 버터 없이도 부드러운 맛을 구현했다. 신세계푸드는 지난해 부처님오신날에는 동자승을 위한 사찰음식 식단을 선보였다. 한 달간 단기 출가 과정을 밟는 동자승을 위해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스테이크, 미트볼, 불고기, 캔햄 등을 식단에 포함했다. 고기는 신세계푸드가 자체 개발한 대체육 베러미트로 대신했다. 신세계푸드는 “사찰식 제품은 동물성 성분이 없는 만큼 수행자에게 육식을 금하는 불교 종교적 가치와 영양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다”며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의미 있는 제품들을 선보이기 위해 박성희 사찰음식 전문가와 협업해 개발했다”고 말했다. 오뚜기 역시 최근 채식 레스토랑 두수고방과 컵밥과 죽 형태 가정간편식(HMR)으로 사찰음식을 선보였다. 두수고방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사찰음식 대가 정관 스님 제자 오경순 셰프가 운영한다. 이 브랜드는 취나물, 곤드레 등 HMR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식자재를 활용한 제품을 내놓는 경향이 있다. 오뚜기에 따르면 오경순 셰프는 직접 수수팥범벅, 들깨버섯죽, 된장보리죽 같은 사찰음식 HMR 메뉴 개발에 참여했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선재스님이 '비건 투어 투 코리아 2023'에서 '한국 사찰음식을 통해 보는 한국의 비건 문화'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뉴스1 주요 식품기업들은 사찰음식이 이전보다 대중에게 친숙해졌다고 보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케이(K)-다이닝(정찬)으로 가치도 높다고 평가한다. 한국식 사찰음식은 이미 글로벌 식품업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 3대 요리 명문학교 르 코르동 블루 에릭 브리파 학과장은 지난해 서울 은평구 진관사를 찾아 “전 세계 유명 셰프들이 현재 추구하는 가치는 자연 존중, 농상공인 보호, 제철 식재료 전파인데, 이는 사찰 음식과 상통한다”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에 출연한 정관 스님처럼 한국 사찰음식의 대가가 세계적인 인플루언서가 나오는 좋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사찰음식은 종교적 색채를 띤 음식에서 머무르지 않고 건강식과 비건식으로 확장할 수 있어 잠재력이 크다는 평가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세계 식물성 식품 시장 규모는 2020년 294억달러(약 39조원)에서 지난해 525억달러(약 70조원)로 커졌다. 김지형 한양여대 외식산업과 교수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비건 채식과 제로웨이스트 문화는 불교가 추구하는 수행 문화와 닮은 점이 많다”며 “생명을 존중하고 음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문화가 확산할수록 사찰음식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진우 기자 ojo@chosunbiz.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