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자동차 등 수출 주력 업종
엔저 지속 땐 한국 경쟁력 밀려
이례적인 엔화 가치 하락이 지속되면서 엔/달러 환율이 지난달 26일 오후 외환시장에서 한때 달러당 160.39엔까지 올랐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이는 일본 거품(버블) 경제 시기인 1986년 12월 이후 약 3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엔/달러 환율이 160엔을 넘어선 것은 올해 4월 29일 이후 2개월 만이다. 사진은 6월27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의 모습. 연합뉴스
38년 만에 기록적인 ‘슈퍼 엔저(엔화 가치 하락)’가 지속되면서 우리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과 경쟁하는 국내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경상수지 흑자 기조에도 악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원화 가치가 동반 하락할 경우 국내 금융 시장 전반으로 리스크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4일 한국무역협회 분석을 보면, 세계 시장에서 한·일 두 나라의 수출 경합도(2023년 기준)는 0.458이다. 수출 경합도가 1에 가까울수록 경쟁이 치열하다는 의미인데, 통상 0.5% 이상이면 높은 수준으로 평가한다.
특히 전통적인 주력 수출 분야에서의 경합도가 높은 편이다. 석유제품 경합도는 0.827에 이르고, 자동차·부품(0.658), 선박(0.653), 기계류(0.576) 등도 높은 편이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은 최근 보고서에서, 엔화 가치가 1% 떨어질 때마다 우리나라 수출액 증가율은 0.61%포인트 감소한다는 분석을 내놨다. 이날도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855.56원으로 전날(858.79원)보다 3.23원 하락했다. 원-엔 재정환율 850원대는 200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한-일 간 수출 경합도가 과거보다는 약해지는 추세이긴 하나 엔화 약세가 장기화할 경우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고 진단한다. 김미루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채연구팀장은 “수출 경합도가 추세적으로 하락했지만 조선·자동차 등 주력 업종에선 비교적 높은 수준”이라며 “현재 우리도 고환율이지만 ‘초엔저’가 지속되면서 수출 기업들이 누릴 수 있는 원화 약세의 긍정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상준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는 지난 2일 한경협 주최 세미나에서 “일본 기업은 상품 단가를 엔화 가치 절하 폭만큼 낮추지 않고 영업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며 “만약 원화가 엔화를 따라 절하되지 않는다면 우리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여행수지 적자 확대로 경상수지 흑자 기조에도 악재가 될 전망이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지난해 여행수지 적자는 125억2700만달러로 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이 중 대일본 적자가 33억8천만달러에 이른다. 한은 관계자는 “통상 유학·출장 자금 지출이 많은 대미 여행수지 적자가 컸는데 지난해부터 엔화 약세 효과로 일본 관광객이 늘면서 대일본 여행수지 적자가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 집계를 보면, 올해 1~4월 일본 방문 관광객은 299만990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06만7670명)보다 45.1%나 증가했다.
외환당국과 전문가들은 ‘원-엔 동조화’ 현상으로 원화 가치가 동반 하락할 리스크를 우려한다. 글로벌 외환 투자자들이 위험 회피를 위해 원화와 엔화에 동시 투자(프록시 헤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해 원화 가치가 동반 하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4월 기자간담회에서 “원화 가치가 주변국 통화에 프록시(대용) 되다 보니 우리 펀더멘털에 비해 과도하게 원화 가치가 절하되는 측면이 있지 않은지를 유심히 보고 있다”고 경계한 바 있다. 지난 4월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를 찍으며 급등할 때도 엔화 약세에 따른 프록시 효과가 컸다는 게 한은의 진단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리서치본부 전문위원은 “국내 산업과 기업이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으로 애로를 겪는 와중에 슈퍼 엔저 장기화로 적지 않은 피해를 보고 있다”며 “원-엔 동조화 현상이 강해진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엔화 가치 방어를 위해 해외 자산을 매도하고 공격적인 긴축에 나선다면 국내 금융 시장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