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과정평가원 |
통상의 수능 출제 과정을 고려하면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나오지만, 출제 당국과 사교육 업체가 유착된 게 사실이라면 파문이 상당할 수 있다.
8일 뉴시스와 교육계에 따르면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 출제본부는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자습서와 학습서, 문제집을 모두 검토한 뒤 수능 출제에 돌입한다.
사교육 경감을 위해 연계가 이뤄지는 EBS 교재를 제외하고 다른 교재와 유사한 문제가 수능에 나오면 미리 풀어 본 학생들이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시 논란이 불거진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지문은 베스트셀러 '넛지'의 저자인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저서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에서 발췌됐다.
그러나 수능이 끝난 직후 해당 지문이 대형 입시학원의 유명 강사가 조모씨가 제공한 사설 모의고사 지문과 한 문장을 제외하고 동일하다는 논란이 확산했다.
시험 직후부터 닷새 간 평가원이 접수 받은 이의신청 663건 중 127건이 영어 23번에 대한 내용이었다.
2023학년도 수능 출제 기간은 시험 당일(2022년 11월17일)까지 39일로 2022년 10월 초 시작됐다.
평가원은 "특정 강사의 사설 모의고사 문항과 지문의 출처가 동일하지만, 문항 유형이나 선택지 구성 등이 다르다"고 밝히며 이의심사 대상에도 올리지 않았다. 강사의 문제는 어휘 뜻을 묻는 문제였지만 수능 문제는 지문을 읽고 주제를 찾는 유형으로 출제됐다.
평가원은 지난해 3월 '2024학년도 수능 기본계획' 브리핑에서도 "전국의 학원 모의고사를 다 수집해서 검색을 해야 하는데 한정된 일정 속에서 검색을 완벽하게 다 해낼 수 없다"고 했다.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교육부는 지난해 7월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이 강사의 사설 모의고사 지문과 유사하게 나온 배경에 대해 수사 의뢰했다고 뒤늦게 밝혔다. 판박이 논란이 생긴 지 8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강사는 현직 교사들에게 금품을 지급하고 구매한 문항으로 교재를 만들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교육부는 조 강사와 현직 교사 4명이 이런 행위에 연루됐다며 청탁금지법 등 위반 혐의로 수사를 의뢰했다.
만에 하나 이런 의혹이 사실이면 파장은 클 수 밖에 없다. 출제오류는 물론 타종오류를 이유로 수험생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수능 공정성에도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다.
지난 2016년에는 현직 교사 2명에게 수능 6월 모의평가 출제 지문을 듣고 이를 강의에서 유출한 유명 수능 국어 강사 A씨가 업무방해 혐의가 인정돼 징역 10개월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전례가 있다.
그럼에도 업계 전문가들은 문항 거래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영어는 저작권 문제 등으로 문제에 쓸 소재 찾기가 어려운 국어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업계 한 전문가는 "영어는 대부분 지문을 영어권에서 유명한 검증된 지문을 많이 사용하고 강사들도 그런 지문을 파는 업체에게 사들여 출제한다"며 "출제위원들이 어떤 지문을 쓸지도 모르고 (출제위원) 본인도 어떤 지문으로 모의고사가 나왔는지 꼼꼼히 보지 않을 것이다. 검증이 국어에 집중된 걸로 안다"고 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크다"며 "국어는 누가 출제위원으로 들어갔는지 알면 짐작할 수 있지만 영어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지문을 출제할 수 있는 범위가 방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