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24.04.23. 오전 11:31
경제 가치 높을수록 소송 장기화 삼성디스플레이 재판 기간만 5년 전직금지 가처분기준도 들쑥날쑥 “신속재판·인력관리제 도입 절실” #1. 올해 2월 SK하이닉스가 퇴사한 연구원 A씨를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이 인용됐다. 신청 후 약 7개월 만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늦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A씨가 이직한 곳은 미국의 경쟁사 마이크론. 글로벌 반도체 업계 3위 기업인 마이크론은 같은 달 4세대 HBM 기술 개발을 건너뛰고 5세대 HBM 양산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A씨는 SK하이닉스에서 D램과 HBM 설계 관련 업무를 총괄한 핵심 인재다. #2. 지난해 6월 중국에 삼성전자 반도체 ‘복제공장’을 만들려 한 혐의로 전 삼성전자 임원 B씨가 구속 기소됐다. B씨는 2018년 8월부터 2019년까지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데이터, 공정 배치도, 설계 도면 등을 빼돌린 것으로 수사됐다. 하지만 B씨의 재판은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7월에야 첫 재판이 시작돼 현재 10차례의 공판이 진행됐지만 본격적인 증인 신문은 올해 1월부터 가능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미래 먹거리 기술 유출 범죄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법원의 ‘신속 재판’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경각심을 심어주는 형사 처벌은 물론 신속한 피해 예방·구제를 위해 민사 소송 절차에서도 ‘패스트트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복잡한 기술유출 재판...1심 길어지고 항소율도 높아=23일 법조계에 따르면 기술유출 재판은 쟁점이 많고 당사자간 주장이 치열하게 대립해 대표적인 고난도 재판으로 꼽힌다. 침해됐다고 지목된 기술이 영업비밀, 산업기술 등 법적 보호대상인지부터 시작한다. 경제적 가치가 높은 기술일수록 기술 자체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길어진다. 인력의 경쟁사 이직이 문제가 된 사건일 경우 채용 과정, 이직 후 담당한 업무가 기술 침해에 해당하는지도 관건이 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경제적 가치가 높은 기술일수록 재판 진행 속도가 더디다. 실제 삼성디스플레이의 OLED 관련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톱텍은 2018년 12월 첫 재판을 시작해 2021년 1월에야 1심 결과가 나왔다. 톱텍은 ‘해당 기술은 삼성과 톱텍이 공동개발했고 삼성이 영업비밀이라고 특정한 정보는 이미 공개돼 동종업계에 알려진 기술’이라고 주장해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하지만 2심은 이를 뒤집어 톱텍 대표 A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수사 개시 5년 만인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가 확정됐다. 헤럴드경제가 2020년부터 올해 3월 사이 확정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위반 사건 판결을 분석한 결과 17개 사건 중 15개 사건이 2심으로 넘어갔다. 일반 형사사건의 항소율이 50%대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대법원으로 향한 사건도 6건에 달했다. 이때문에 기술 중요도 판단을 위해 피해 기업의 법정진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형사 재판에서는 검찰이 피해 기업을 대신하지만 기술 난도, 기술 가치 등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대형로펌에서 기술유출 사건은 전담하는 변호사 C씨는 “증인 신문 외에도 피해자, 법률 대리인의 의견 제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형사 재판 지연, 민사도 영향...신속한 전직금지 필요=형사 재판 지연은 영업비밀 침해금지 가처분, 손해배상 등 민사소송에도 영향을 끼친다. 피해 기업이 직접 기술 유출 증거를 확보하는데 한계가 있어 검찰의 수사 결과와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다른 대형 로펌 변호사 D씨는 “신속한 재판은 결국 입증을 얼마나 정확하고 빠르게 하느냐의 문제다. 기술 유출의 경우 증거 확보가 어려워 수사를 통한 압수수색이 없으면 입증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즉각적인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신청하는 ‘전직금지 가처분’도 들쑥날쑥하다. 전직금지 가처분은 기술 인력이 퇴직할 때 작성한 약정서를 위반했을 경우 이에 따라 근무를 막아달라며 제기하는 소송이다. 이직을 통한 기술 유출을 막는 임시방편이다. 통상 전직금지 가처분은 늦어도 2~3개월 안에 결론이 나지만, 기술유출 사건의 경우 6개월 이상 걸린다는 것이 법조계 전언이다. 민사소송법 상 전직금지 가처분 당사자(유출자)의 주소지로 관할 법원이 정해지다 보니 법원별·재판부별로 통일성 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재판부에 따라 기업과 유출자가 맺은 ‘전직 금지 약정’의 유효성 판단도 달라진다. 약정 자체가 과도하게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청구를 기각하는 경우도 잦다고 한다. 정부 차원의 인력 관리 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변호사 C씨는 “중요 기술 담당 인력 리스트를 만들어 갑작스레 퇴사하고 해외로 출국하면 이를 기업에 알릴 수 있도록 하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며 “광범위하게 인력을 관리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국가 핵심 기술 등 중요 기술과 관련된 인력에 대해 관리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지영 기자 박지영 park.jiyeong@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