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처리 기간 ‘입맛대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의 청탁금지법 등 위반 신고사건에 대한 엄정한 조사를 촉구하는 민원을 신청하려는 시민들이 지난 3월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민권익위원회 정부합동민원센터 앞에 줄지어 서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국민권익위원회에 접수된 주요 부패·공익 신고들의 처리 기간은 신고 대상이 여권인지 야권인지에 따라 확연히 차이 난다. 28일 업무일을 기준으로 현재 김건희 여사(108일)와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105일), 여권에서 추천한 선거방송심의위원(68일) 등 여권 인사를 대상으로 한 심의는 법정 시한(90일)을 넘기거나 예외적으로 신고 처리가 연장됐지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부인 김혜경씨(34일)를 비롯해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41일)과 남영진 전 한국방송(KBS) 이사장(28일) 등 야권 인사를 겨냥한 심의는 연장 한번 없이 신속하게 처리돼 수사 의뢰됐다. 정치권에서 “국민권익위가 아닌 대통령권익위냐”(더불어민주당)는 반발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은 권익위에 접수된 신고 사항의 처리 기한을 최장 90일(60일 뒤 예외적 30일 연장 가능)로 규정한다. 조항을 위반해도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훈시규정’이긴 하나 지키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권익위는 일부 신고들에 대해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처리를 미루고 있다. 대체로 여권에 불리한 신고들이다. 권익위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청탁금지법 위반 등으로 신고한 참여연대에 처리 기한 연장을 통보하면서 “쟁점이 있다”고만 밝혔을 뿐 정작 그 쟁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김 여사가 명품 가방을 받고 돌려주지 않은 점이 명확히 확인되는 등 사건의 얼개가 간단하다고 보고 있어, 기약 없이 미뤄지는 권익위 심의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의심한다.
언론 탄압 선봉에 섰다는 비판을 받는 방송통신심의위(방심위) 관련 신고 처리도 하세월이다. 공익제보자는 지난해 12월23일 류 방심위원장의 청부민원 의혹을 권익위에 신고했지만, 권익위 조사는 업무 분장 등을 이유로 50일 만에 개시됐다. 이 의혹의 뼈대는 류 방심위원장이 가족과 지인 등을 동원해, 뉴스타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파일’을 인용보도하는 등 윤 대통령과 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방심위에 심의 민원을 넣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해당 보도를 선거 공작이라고 규정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펴고 있는 점을 고려해 권익위가 의도적으로 심의를 미룬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여당과 보수단체에서 추천한 22대 총선 선거방송심의위원들의 ‘셀프 민원심의’ 의혹도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기한이 연장됐다. 이날로 민주노총 언론노조 방심위 노조가 권익위에 신고한 지 업무일 기준 68일째다. 보수성향 단체인 공정언론국민연대(공언련)가 선방위원으로 추천한 권재홍 선방위원과 국민의힘에서 추천한 최철호 선방위원은 각각 공언련 이사장과 전 대표인데, 이들은 공언련에서 선방위에 민원을 제기한 사실을 알고도 이해충돌방지법에 따른 회피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공언련과 여당은 선거 기간 중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를 대상으로 무더기 민원을 제기했고, 선방위는 이를 심의해 역대 최다인 30건의 법정 제재를 의결했다.
늑장 처리 일색인 여권 관련 신고와 달리, 야권 인사를 겨냥한 신고는 일사천리로 처리돼 수사기관으로 넘겨졌다.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은 앞선 경찰 수사 결과 불송치됐음에도, 권익위에 신고가 접수된 지 34일 만에 대검에 이첩됐다. 검찰은 강제수사 끝에 김씨를 재판에 넘겼다. 권익위는 반부패 제도 및 정책을 총괄하는 국무총리 직속 기구로, 수사권은 없으나 법령 유권해석이나 자체 조사 등을 통해 청탁금지법과 이해충돌 위반 등을 일차적으로 판단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권익위를 거쳐 수사기관에 이첩되는 사건은 일반 고발 사건에 견줘 무게감이 실린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공영방송 경영진을 ‘찍어내기’할 때도 권익위가 힘을 보탰다. 남영진 전 한국방송 이사장과 문화방송(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권태선 이사장 및 김석환 이사 모두 각 방송사 내 보수성향 노조의 신고(청탁금지법 위반 소지)로 권익위 조사가 개시돼 각각 28일, 41일 만에 수사 의뢰됐다.
전문가들은 수사와 감사를 앞세운 윤석열 정부의 사정 통치에 권익위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권익위가 이처럼 신고 처리를 미루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다. 훈시규정이라 하더라도 사안이 복잡하고 조사할 것이 많아 어쩔 수 없이 미뤄지는 것을 양해한다는 것이지, 특정 사건을 밑도 끝도 없이 미루는 걸 양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권익위가 정부의 눈치를 보며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