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인 ‘우주의 비밀’… 마침내 ‘증거’를 포착하다[북리뷰]
입력2023.01.13. 오전 9:04
태양계로부터 5500만 광년 떨어진 M87 은하의 중심에 위치한 블랙홀. ‘이것이 최초의 블랙홀 사진입니다’를 쓴 저자는 우주에 드리운 어둠의 정체였던 블랙홀 이미지를 얻으려는 과학자들의 분투를 다룬다. ⓒEHT
■ 이것이 최초의 블랙홀 사진입니다 | 하이노 팔케·외르크 뢰머 지음 | 김용기·정경숙 옮김 | 에코리브르
극한 중력 갖는 ‘지옥의 입구’
‘영원히 볼 수 없다’ 예측 엎고
2019년 ‘M87’ 최초 공개돼
전 세계 전파 망원경 연결한
‘EHT 프로젝트’ 팔케 의장
한 장의 블랙홀 사진 얻기까지
과학자들의 지적 열망과 함께
‘한계 - 초월’ 철학적 사유 엮어
2019년 4월 10일 벨기에 브뤼셀 유럽집행위원회 기자회견장. 천문학자이자 ‘사건 지평선 망원경(EHT)’ 과학위원회 의장인 하이노 팔케가 전 세계 언론 앞에 섰다. 블랙홀 주변의 보이지 않는 한계 지역을 뜻하는 ‘사건의 지평선’과 망원경을 합친 조어인 EHT는 블랙홀 촬영을 위해 세계에 흩어진 전파 망원경을 연결한 국제 협력 프로젝트. 팔케 의장은 이날 회견에서 20여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한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우주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뿜어내는 도넛 모양의 주황빛 고리.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M87’ 은하 중심에 놓인 블랙홀이 찍힌 사진이었다. 연료를 다 소모해 완전히 타버린 ‘죽은 별’에서 생성되는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극한의 중력을 갖는 천체다. ‘지옥의 입구’라 불리는 블랙홀의 정체를 우리 눈으로 관측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은 이날 공개된 사진 한 장으로 무너졌다. EHT 프로젝트를 지휘한 팔케가 과학 저널리스트와 함께 쓴 책은 블랙홀 관측을 통해 지식의 지평을 넓히려 분투한 과학자들의 드라마를 담은 논픽션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블랙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나 이론을 내놓지 못했던 과학계가 인류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한 과정을 되짚는다.
저자는 친구들과 골목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집어삼키는 청소차에 매료됐다. 훗날 물리학과에 진학해 블랙홀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순간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청소차를 보며 꿈을 품은 소년이 ‘우주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꽂힌 건 자연스러운 운명처럼 여겨졌다. 세계 최초로 블랙홀 사진을 얻은 여정이 책 뼈대를 이루지만, 한계를 뚫는 성과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학자들의 분투가 있었다. 책이 비중 있게 다루는 인물은 지난 2020년 나란히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와 라인하르트 겐첼 독일 막스플랑크 외계물리학연구소장, 앤드리아 게즈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다. 상대성 이론을 정립한 아인슈타인은 극단적으로 중력이 강한 상태인 ‘특이점’이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으나 펜로즈 교수는 물질이 자신의 중력으로 수축해 쪼그라들면 어느 순간 특이점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블랙홀의 존재를 밝혀냈다. 이 연구를 이어받은 겐첼 소장과 게즈 교수는 지구로부터 약 2만7000광년 떨어진 우리 은하 중심에 위치한 블랙홀 ‘궁수자리 A*(A별)’을 관측했다.
‘사건 지평선 망원경’ 프로젝트에 참여한 천문학자들. 왼쪽 네 번째가 책 저자인 하이노 팔케. ⓒSalvador Sanchez
동료들의 이 같은 성과를 확인한 저자는 ‘블랙홀 관측’을 넘어 ‘블랙홀 사진’을 손에 넣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어둠의 베일에 가린 블랙홀이 오랜 세월 과학계가 찾아 헤맨 ‘범죄자’라면, 혐의를 입증할 ‘정황 증거’는 충분히 쌓였으니 현장에서 ‘생포’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담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EHT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수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7년 총 8곳의 천문대가 하늘을 겨냥했다. 칠레와 하와이에 각 두 대, 스페인·멕시코·미국·남극에 각 한 대씩 망원경을 배치했다. 해발 5000m 이상의 산기슭에 관측소가 놓인 칠레에선 건조하고 희박한 공기에 대처해야 했고, 남극에선 영하 50도의 추위와 싸워야 했다. 단 열흘의 관측 기간이 주어진 가운데 악천후 탓에 며칠을 날려 먹고, 추위로 망원경이 얼어붙은 우여곡절 끝에 연구진은 블랙홀의 이미지를 건져 올렸다.
숨겨진 것을 보려는 과학자들의 지적 열망을 기록한 책은 우주의 신비와 종교에 관한 철학적 사유로 나아간다. ‘블랙홀 생포’에는 성공했지만, 블랙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저자는 천체물리학의 궁극적 한계인 블랙홀에서 ‘경험의 가능성을 초월하는’ 내세를 연상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담긴 ‘현대적 신화’가 블랙홀에 응축돼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한계를 질문하는 사람은 신(神)을 피해갈 수 없지만, 한계와 부딪히며 하늘로 가는 문을 흔드는 게 인간의 역할이다. 저자는 “한계야말로 오만을 막고 우리가 믿고 희망할 수 있게 해주는 위로”라며 이렇게 다짐한다. “우주로 향하는 여정은 ‘지식의 정복’이 아니라 정신이 확장하는 ‘순례’다. 오만한 세계 정복자에서 겸손한 탐구자로 돌아가야 할 때다. 거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일전에서 패배하더라도 어둠을 밝히는 싸움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 376쪽, 2만5000원.
나윤석 기자(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