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23.02.21. 오전 9:01
수암종택의 녹사청 건물. 봉조하 녹봉을 가져왔던 하급관리와 일꾼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명당의 조건을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 지점에 해당하는 자리에 양기(陽氣)가 뭉쳐 있다고 보는 것이 한자문화권의 전형적인 명당 조건이다.
또 하나의 명당 조건이 있다. 삼산양수(三山兩水)가 그것이다. 삼산(三山)이라는 것은 산 봉우리가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세 번째 봉우리 밑이 좋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스리스텝'이다. 스리스텝 밑에 명당이 있다는 논리이다.
왜 스리스텝이냐? 산의 봉우리가 여러 번 융기하였다가 밑으로 내려오면 그 내려오는 과정에서 땅의 기운이 부드러워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운이 너무 강하거나 거칠면 부담이 된다. 산이나 사람이나 너무 거칠면 부담스럽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면서 부드러운 인격이 상대하기에 편한 이치와 같다.
두 강물이 양쪽에서 감아돈다는 의미의 ‘이강정사’. 수암종택의 별칭이다.
합수 지점이 명당인 이유
그러려면 적어도 세 봉우리 정도는 거치면서 내려와야 한다. 물론 네 봉우리도 좋다. 적어도 세 봉우리라는 뜻이다. 중간에 봉우리가 없이 직선으로 바로 내려오면 거칠다. 마치 담배의 필터가 없는 것과 같다. 기운도 필터링이 필요한 것이다.
양수는 그 터의 양쪽에서 물이 흘러와 앞에서 합수(合水)되는 것을 의미한다. 양쪽 물이 흘러 내려와 합수되는 지점이 명당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두물머리, 즉 양수리(兩水里)가 여기에 해당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이 경기도 두물머리다. 조선의 천재 다산 정약용의 집이 이 두물머리에 있고, 재력가들의 별장도 여기에 많다. 미국 맨해튼도 두물머리 지점이다. 허드슨강과 이스트강이 합수되는 지점이 맨해튼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라다보이는 다운타운 쪽이 합수 지점이다. 여기에 세계의 돈이 몰려 있다. 아프리카 추장의 돈도 맨해튼 금융에 저축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세계 각국의 돈을 끌어들이는 맨해튼 풍수도 범상치 않은 것이다.
특히 물은 돈을 상징한다. 돈 없으면 죽는다. 돈이 문제이다. 그 돈을 강물이 끌어다 준다고 믿었다. 삼산양수에서 양수가 즉 돈이다. 강물은 기운을 흩어지지 않도록 모아주고, 물류를 실어다 나른다. 기운을 모아준다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영발의 관점이고 배로 물류를 실어 나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경제적 관점이다. 양수(兩水)는 영발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이라고 하는 이판사판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주는 조건이다.
'삼산양수에다가 절터를 잡아라'라고 지침을 준 인물은 고려 말의 지공선사이다. 지공은 인도 사람이다. 제자인 나옹에게 '네가 앞으로 고려에 돌아가 절터를 잡을 때는 삼산양수가 되는 지점에 잡아라'라는 교시를 내렸다.
경북 상주 중동면의 수암종택(修巖宗宅)이 바로 그런 곳이다. 두 개의 강물이 둘러싸고 내려오다가 합수되는 지점에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대단히 훌륭하다.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柳袗·1582~1635)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종택이다. 서애를 모시는 하회마을의 충효당도 낙동강 물이 감아도는 명당이다. 하회의 특징은 물이 감아돈다는 점이다. 이 집안 류씨들은 물을 특히 중시했던 것 같다. 수암종택도 역시 물이다. 양쪽 강물이 이렇게 합수되면서 집을 지을 만한 터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어떻게 이 집안 사람들은 이렇게 범상치 않은 명당만 골라서 집을 지었을까. 이런 터를 잡기 위해서 상당한 시간과 정력, 그리고 돈을 투자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터는 강물만 좋은가? 산도 좋다. 삼산의 끄트머리 지맥이 이 집터 주위로 떨어졌다고 여긴다. 종택 바로 뒤의 지맥은 영양 일월산에서 구불구불 내려온 맥의 최종 종착지로 여긴다. 일월산(日月山). 이름도 일월이 들어가 있다. 음양을 숭상하는 한국 주역파(周易派)에서 중시하는 산이 일월산이다. 경북 영양에서부터 내려온 맥이 여기에서 열매를 맺었다.
‘녹사청’ ‘고풍’ ‘일삭삼전’이라고 현판에 써 있다.
일월산·속리산·팔공산이 둘러싼 땅
집터의 오른쪽으로 흐르는 낙동강 바로 너머에는 나각산(螺角山)이 있다. 소라 뿔처럼 생겼다는 산이다. 수암종택에서 나각산을 바라다보면 당나귀를 타고 금의환향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귀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이 나각산은 속리산 자락의 끄트머리가 맺힌 곳이다. 끄트머리라고 하는 것은 호박의 열매가 끝에 열리듯이 끝자락에 자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결국(結局)을 이뤘다고 본다. '결국'은 원래 풍수용어이다.
그리고 양쪽 물이 합수하는 지점에는 '토봉'이 있다. 토끼 묘(卯)를 토봉이라고도 부른다. 이 토봉은 대구의 팔공산 자락이 북서쪽으로 올라와서 한 가닥이 맺힌 곳이라고 한다. 즉 수암종택을 둘러싸고 삼산에 해당하는 일월산, 속리산, 팔공산이 모두 둘러싸고 있는 셈이다. 영남의 명산 세 군데에서 내려온 지맥이 수암종택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터를 보는 관점이 확대된다. '이러한 대자연의 웅장한 산세에 내가 둘러싸여 살고 있구나!' 하는 감탄이다. 그러니까 종택의 백 리, 이백 리 밖에는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이 이 집을 멀리서 밀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호쾌한 대자연 속에 내가 들어앉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수백 리 밖의 산들 이름까지 그 지맥을 대는 것이다. 의미 부여의 문제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양수는 어떤 물인가? 낙동강과 위천(渭川, 渭江)이다. 위수는 강태공이 낚시하던 강이다. 위천의 유래는 강태공의 위수이다. 한쪽에 위강이 감아돈다면 다른 한쪽에는 낙동강이 감아돈다. 강이 감아도니까 수암종택에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 불편함이 따른다. 그 불편을 감수하고 터를 잡은 것은 명당에 대한 기대가 실생활의 불편보다 훨씬 컸음을 의미한다. 즉 이 집을 가려면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만 하였다.
이 집안 후손인 류우익씨(전 대통령 비서실장)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낙동대감 류후조(1798~1876) 관련 일화이다. 류후조가 퇴직을 하고 고향 집에 있으면서 나루터 옆에서 소일할 때였다. 지나가던 어떤 양반이 류후조를 불렀다. "내가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하니까 영감이 나를 등에 업고 저 나룻배 있는 데까지 가세." 나룻배까지는 정강이까지 물이 들어와 있어서 가랑이를 걷어야 했으므로 업혀 가면 물에 옷을 젖지 않고도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류후조를 시골의 평범한 노인으로 봤던 것이다. 류후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가랑이를 걷었다. 그 양반입네 하는 사람을 등에 업고 나룻배가 정박한 곳까지 물을 첨벙거리며 갔다. 그런데 등에 업힌 양반이 업혀 가다가 노인네가 목에 차고 있는 옥관자(玉貫子)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관자(貫子)도 품계가 있다. 판서 이상의 정승급이 차고 있는 관자가 옥관자였다고 한다. 자기를 업고 가는 시골 영감이 옥관자를 차고 있는 게 아닌가! 업힌 사람은 깜짝 놀랐다. "대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거 몰라보고 그랬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네 이 사람아. 모르고 그랬겠지."
강력한 기운을 상징하는 바위맥이 수암종택의 안채로 들어와 있다.
영남 정승급 3명 중 2명을 배출
류후조가 대원군 때 좌의정을 했다. 영남은 정3품 이상의 고위직 벼슬은 조선 후기 250년간 할 수 없었다. 노론들이 시켜주지 않았다. 호남 차별 못지않은 차별을 조선시대에는 영남이 받았다. 서애 류성룡이 정승을 지낸 다음, 좌의정이기는 하지만 삼정승급에 올라간 인물은 류후조가 유일하다. 영남에서 서애 윗대로 정승을 지낸 인물은 상주 출신인 소재 노수신(1515~1590)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없다. 영남에서 배출한 정승급 3명 가운데 2명이 류씨들이다. 한 명은 하회에서 나왔고, 다른 한 명은 중동면 수암종택에서 나왔다. 대원군이 별볼일 없이 전국을 유랑하던 시절에 상주 중동면에 인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인물이 류후조였다. 류후조를 만나니 과연 인물이라는 느낌을 얻었다. 이때 류후조가 대원군에게 대접한 탕이 백비탕(白沸湯)이다. 찬물을 팔팔 끓여서 한 대접 준 것이 백비탕이다. 그만큼 살림살이가 가난했다는 뜻이다. 백비탕은 영남 선비의 자존심과 선비정신, 그리고 배고픔을 상징하는 탕이었다. 훗날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상주의 류후조가 생각났다. '벼슬을 줘야 겠다.' 지역 안배의 탕평 차원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차별받던 영남 선비가 서울에 올라가서 벼슬을 했고, 벼슬이 끝난 후에는 봉조하(奉朝賀)라는 명예직을 또 받았다. 조선시대에 가장 귀한 벼슬이 봉조하라는 자리가 아닌가 싶다. 실무는 보지 않고 조정에 행사가 있을 때만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는 역할이다.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하다가 퇴직한 퇴직 관료에게 내린 벼슬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녹봉이 나왔다. 근무는 하지 않고 의미 있는 행사만 참석하고 연봉은 받는 자리. 이거 아주 매력적인 자리가 아닌가! 봉조하 평균연령은 68세쯤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배출된 봉조하는 68명이었다는 데이터가 있다. 류후조가 1872년에 봉조하를 받았다고 하니 죽기 4년 전에 받은 것이다.
고택 중 유일한 녹사청
지금 수암종택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측에 'ㄴ' 자 건물이 눈에 띈다. '錄事廳(녹사청)'이라는 건물이다. 현판 가운데는 '古風(고풍)'이라고 쓰여 있다. 녹사청은 무엇인가. 류후조가 봉조하에 임명되었을 때 그 녹봉을 가지고 왔던 하급관리와 하인들이 머무르던 숙소였다. 전국 고택 가운데 이처럼 녹사청이 있는 경우는 여기뿐이다. 그만큼 희귀한 건물이다. '고풍'의 왼쪽에는 '一朔三錢(일삭삼전)'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는 류후조의 손으로 썼다는 수결이 새겨져 있다.
'일삭삼전'은 무슨 소리인가? 녹봉으로 가져온 쌀과 곡식을 사람이 운반해야 했을 것인데 이 곡식 운반을 했던 일꾼들에게 류후조 측에서 지급했던 임금 내지는 수당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그 임금이 1달에 3전이었다는! 공짜로 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수암종택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안채 뒤로 내려온 커다란 바위이다. 바위는 강력한 기운을 상징한다. 이 바위가 안채의 입수맥(入首脈)에 자리 잡고 있다. 입수맥은 기운이 들어오는 지점이다. '인풋(In put)' 지점이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채로 바위맥이 들어오지 않고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로 바위맥이 들어오게 건물 배치를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태어나는 아이들이 기운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임신과 출산을 하는 공간에 바위맥이 있어야 태어나는 아이가 인물이 나온다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믿었다. 가장 강력한 기운이 뭉쳐 있는 터는 안채에다 배치한 것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