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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식2023-05-24 1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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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굴비의 영광, 4대 종교의 굴기…영광스런 ‘야단법성’
내용

 

입력2023.05.24. 오후 12:26

 

법성포 굴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사진제공|영광군청

밥맛없는 세상, 그나마 입맛을 살려준 곳은 영광이다. 전남 법성포는 조기를 엮고 말려, 500년 넘게 굴비굴기를 이뤘다. 명종에 받쳐진 ‘정주굴비’는 굴비 맛을 조선에 알린 신호탄이다. ‘굴비’ 원류는 추론이 난무해도, 맛은 두말이 필요없다. 맛을 살린 곳에 멋이 거하는 것은 인지상정. 이 명당에 법이라고 샛길을 택할 리 없다. 백제불교는 법성포로 들어왔다. 원불교는 영광을 발원지로 교세를 키웠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순교의 역사를 이 곳에 아로 새겼다.
 

영광 백수해안도로 노을전망대에 있는 괭이갈매기상. 사진제공|영광군청
 

백제불교최초도래지…마라난타 첫 발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사진제공|영광군청

마라난타는 인도 승려다. 그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법성포다. 이를 기념해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에는 23.7m 높이의 사면대불상이 서있다. 그곳엔 마라난타 존자, 좌우보처로 관음과 세지보살이 있으며, 주존불인 아미타불이 정면에 있다. 그 뒤편 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법성포다.

중국에서 불교를 전래 받은 고구려·신라와 달리 백제는 인도승인 마라난타 존자를 통해 불교를 전래받아 완전히 다른 양식으로 받아들였다.

이곳에는 간다라 불교 문화 예술의 특징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간다라 유물관, 간다라 사원 양식의 대표적인 탑원이 자리하고 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사진제공|영광군청

간다라 유물전시관의 유물들은 모두 파키스탄 대사관의 협력을 얻어 건너온 것이다. 스와트, 페샤와르, 탁실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간다라 불교문화에 대한 실명과 실제 2~6세기쯤 소조불상불두들과 전각 등 석조 문화재들이 있어 간다라 양식을 살필 수 있다.
 

간다라 유물전시관의 파키스탄 기증 전시물. 사진|강석봉 기자

간다라 유물전시관을 나오면 108개의 계단이 보이고, 그 시작점에 부처님의 발자국 모양이 찍힌 ‘불족적’이 있으며, 그 끝에 사면대불이 있다. 108번뇌를 하나하나 녹이며 108개의 계단을 올라 부처님과의 만남에 이른다는 의미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사진|강석봉 기자

족장부터 사면대불로 향하는 계단 가운데엔 부용루라는 이름이 붙은 법랑이 있다. 부용루 벽면에는 석장 이재순 장인이 23면에 걸쳐 부처님의 전생 인연담과 일대기를 부조 조각을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다.
 

불갑사…천년고찰 백제불교의 효시

 

불갑사. 사진제공|영광군청

마라난타 존자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전해진다. 침류왕 원년(364)에 인도 서북 지역의 간다라 마라난타 성인이 중국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법성포에 당도하며 불법이 시작됐다는 내용이다. ‘부처 불(佛), 첫째 갑(甲), 절 사(寺)’라는 한자어처럼 불갑사는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와 처음 세운 사찰. 모악산이라 불리던 산 역시 불갑사가 들어서며 ‘불갑산’이라 불리게 됐다.

불갑사는 세 가지 간다라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대웅전 지붕 한가운데에 툭 튀어나와 있는 스투파, 소슬꽃무늬와 보리수문양, 보상화문의 문양이 조각된 화려한 색감의 대웅전 정문, 석가모니불을 북쪽에 놓고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해 대웅전의 정면과 우측면을 모두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불갑사 꽃무릇(적산). 사진제공|영광군청

불갑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고려 충정왕 3년(1350)에 각진 국사가 삼창을 하면서부터다. 당시에는 31개의 암자에 1000여 명의 스님이 머물렀던 으뜸 사찰이었다고 한다. 각진 국사가 입적한 후 제자들이 사리함을 불갑사로 옮겨 왔으며, 왕명으로 비문을 썼다. 지금도 불갑사 경내에는 각진국사비가 모셔져 있다. 하지만, 정유재란과 6·25 한국 전쟁 등으로 사찰이 완전히 전소되면서 현재는 비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불갑사. 사진제공|영광군청

불갑사 일주문을 지나면 탑원과 108좌대가 있다. 마라난타의 출신지인 간다라 양식에 따라 조성된 탑원을 본뜬 것이다.

불갑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3.5m 크기의 목조 사천왕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이 있다. 전북 무장 소요산 연기사에 있던 사천왕상은 연기사가 전소하면서 설두대사에 의해 1876년 불갑사로 옮겨졌다. 그 이후부터는 ‘사천왕의 보호 덕분’에 불갑사의 전각이 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불갑사. 사진제공|영광군청
 

원불교 영산성지…영광에 뿌리를 둔 원불교

 

영광 영산성지. 사진제공|영광군청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영광에서 나고 자랐다. 영산성지는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고 제자들을 양성한 원불교 발상지다.

소태산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호기심 많던 소태산은 자신의 의문을 풀고자 11살부터 5년 간 매일 삼밭재 마당바위에 올라 산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해도 산신은 커녕 하물며 도사도 만날 수 없었다.
 

영광 영산성지. 사진제공|영광군청

소태산의 세상에 대한 의문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그러다 1916년 4월 28일 새벽, 26살의 소태산은 한 순간 몸이 가벼워지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원불교가 탄생했다.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대각절’은 원불교의 가장 큰 명절이다.
 

기독교인 순교지…우리나라 최대 기독교 순교지

 

영광 염산교회 인근의 기독교인순교탑. 사진제공|영광군청

영광에서는 6·25 한국전쟁 당시 194명의 기독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염산은 국군과 북한군의 정치적 갈등이 심했는데 특히 북한군에게 기독교인들은 눈엣가시였다. 가혹한 학살이 순교의 역사로 남았다. 염산교회와 야월교회에서는 학살 당시의 아픔을 엿볼 수 있다.
 

영광 기독교인 순교지 염산교회. 사진제공|영광군청

교인들은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되거나 죽창에 찔려서 혹은 몽둥이질로 죽음을 맞았고, 몸에 무거운 돌을 매단 채 손발이 묶여 인근의 설도 앞바다에 산 채로 수장되기도 했다. 염산교회에서는 교인 77명이, 야월교회에서는 전 교인 65명이 2~3개월에 걸쳐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두터운 신앙으로 순교했다.
 

영광 기독교인순교지 염산교희. 사진|강석봉 기자
 

천주교인 순교지…성스러운 빛을 위한 순교의 길

 

영광 천주교인순교지. 사진제공|영광군청

1937년 설립된 영광성당의 역사는 올해로 81년째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 시기에 총 여섯 명의 박해 받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 중 이화백과 양반 오씨의 참수터는 성당 앞 도동리 석장승(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91호)이 있는 자리로 추정한다.

이에 영광성당은 지난해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아 영광의 순교자와 유배자를 기억하고, 천주교 순교역사와 순교정신을 배울 수 있는 순교자기념관을 개관했다.
 

백수해안도로…환상의 드라이브

 

백수해안도로 등대. 사진제공|영광군청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백암리 석구미 마을까지 16.8㎞에 달하는 해안도로로, 기암괴석·광활한 갯벌·불타는 석양이 만나 황홀경을 연출한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특히 해안도로 아래 목재 데크 산책로로 조성된 3.5㎞의 해안 노을길은 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걷기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2006년 건설교통부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2011년 국토해양부의 제1회 대한민국 자연경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백수해안도로. 사진제공|영광군청

이곳의 괭이갈매기 서식지는 천연기념물 제389로 지정됐다. 바로 앞에 황금어장인 칠산바다가 있는 덕이다. 노을전망대 갈매기상은 죽고 죽은 애틋한 부부가 괭이갈매기로 환생했다는 이야기를 웅변한다.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국내 유일의 노을전시관을 비롯하여 다양한 펜션과 음식점 등이 갖추어져 있다.
 

영광 백수해안도로. 사진제공|영광군청

강석봉 기자 ksb@kyunghyang.com

강석봉 기자 ks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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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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