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소년 연규(홍사빈)에게 산다는 건 지옥이다. 의붓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야구방망이를 휘두른다. 연규는 걸어잠근 방문 틈 사이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가슴을 졸인다. 집 밖도 지옥이긴 마찬가지다. 동네 또래들은 연규를 보고 그가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지독히 가난한 아이임을 금새 알아차린다. 그러니 주먹과 발길질을 날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
연규의 유일한 희망은 돈을 모아 엄마와 같이 ‘화란’(네덜란드)으로 떠나는 것이다. “사회 복지도 잘 돼있고 다들 비슷비슷하게 산다”는 그곳에서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76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영화 <화란>은 지옥 같은 연규의 현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24일(현지시간) 프랑스 칸 드뷔시 극장에서 베일을 벗은 이 작품은 연규가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송중기)을 만나 위태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며 펼쳐지는 누아르 드라마다. 신인 감독 김창훈의 장편 데뷔작이다.
아버지 없는 소년에게 치건은 처음 만난 ‘남자 어른’이다. 의붓 동생 하얀(김형서)을 지키려다 싸움을 한 연규의 합의금 300만원을 치건은 조건 없이 내준다. 치건 역시 학대를 받고 자란 인물로 자신과 비슷한 연규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더 큰 불행이 닥쳐온다. 연규가 조직에 발을 들이고 인정 받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가상 도시 ‘명완시’는 희망도 미래도 없는 동네로 묘사된다. 정치는 썩었고, 조직 폭력배가 뒤에서 모든 것을 주무른다. 구급차도, 경찰차도 오지 않는다. 누아르(불어로 ‘검다’는 뜻)라는 장르를 이름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 오직 ‘악’으로만 채워져 있다.
전날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 감독은 “범죄의 파장이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며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강요당하고 위태롭게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의도된 폭력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인물들의 선택은 매번 극단적이고, 이야기도 자연히 극단으로 치닫는다. 연규 역시 조직에서 익힌 ‘어른 세계’의 룰을 체현하고 폭력의 일부가 된다. 위기 앞에서 동생 하얀을 넘기는 방식도 폭력 그 자체다.
오직 악과 악인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그려온 작품은 이미 여럿 있다. 이른바 ‘한국형 누아르’라 불리는 작품들이다. 송중기는 전날 인터뷰에서 <화란>의 매력으로 “기존 상업 영화의 문법과 다른 점”을 꼽았다. 신인 감독의 저예산 영화인 만큼 신선함이 무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한 세상을 비정하게 그리는 것은 이 계보를 잇는 영화들의 가장 특징이다.
특히 아쉬운 점은 몇몇 캐릭터의 도구적인 활용이다. 조직으로부터 적은 돈을 빌렸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진 오토바이 배달 기사, “빚 갚으라”며 무자비하게 주먹을 쓰는 송중기의 부하 직원, 그의 손에 희생되는 배달 기사의 아이는 영화의 영어제목처럼 ‘호프리스’(Hopeless·희망없는)한 세상을 환기시키는 데만 이용된다. 영화 종반부, 의도된 폭력의 세계에서 “왜 걔(연규)만 못 괴롭혀서 안달이냐”고 소리치는 하얀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건 이 때문이다.
음향 효과와 함께 고집스럽게 보여주는 신체 훼손 장면은 일부 관객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배우들은 강한 연기로 인상을 남긴다. 연규 역을 맡은 신예 홍사빈은 발버둥치는 소년을 강렬하게 연기한다. 송중기는 지금껏 보여준 것 없는 서늘한 얼굴을 보여준다. 김형서(가수 비비)는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뛰어난 배우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국 개봉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칸 입성한 송중기 “성공은 많이 했다···이제 불확실한 게 좋아”
불확실한 것에 도전할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우 송중기는 용기를 냈다. 그리고 데뷔 후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