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24.04.19. 오후 12:01
'아름다운 비단(위신) 상하게 하지 않으리니 시험 삼아 재주를 펼치게 해주소서.'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1168~1241)는 30대 때 이런 글을 써 높은 관직에 있던 지인의 아버지에게 구직을 부탁했다. 과거시험에 23세에 급제하고도 8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관료 인원보다 합격자가 많아 당시 소위 '백' 없는 이들은 쉬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부패가 만연한 무신정권 시절, 과거시험에 붙은 청년들은 관직을 얻지 못해 끼니를 거를 정도로 고생했다. 강민경 지음·푸른역사 발행·388쪽·2만 원 책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는 이규보의 자취를 통해 당시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박물관 학예사인 저자 강민경씨는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을 재해석해 고려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먹고살았는지에 주목한다. 시 '남헌에서 우연히 읊다'엔 "붉은 생선을 회로 쳐서 바야흐로 먹고자"란 문구가 있다. 유추해 보면, 이규보가 살았던 13세기 초 고려 사람들도 생선을 회 쳐서 먹었다. 한국 문학 작품에 생선회가 등장한 것도 처음이다. '동국이상국집'엔 "읍이 망하면 대왕은 누굴 의지하겠느냐. 제사도 끊겨 나그네처럼 떠돌 것"이란 내용의 제문이 있다. 여기서 대왕은 동악(토함산) 신령을 뜻한다. 무신정권에 반발해 경주에서 민란이 일자 정부군으로 발령받은 이규보가 승리를 바라며 쓴 제문으로, '우릴 도와주지 않으면 산신령이라도 제삿밥 얻어먹기 힘들 것'이라고 협박하듯 썼다. 난세였지만, 고려 사람들의 기개는 높았나 보다. 영웅담을 쏙 빼고 당시 민속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해 흥미롭게 읽힌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자 프로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