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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식2024-05-30 1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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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빈곤층의 천국인가 버림받은 땅인가"…"쪽방촌"의 두 얼굴
내용

 

입력2024.05.30. 오전 8:01 수정2024.05.30. 오전 8:01

 

 

열악한 주거환경 속 복지 혜택…"해악과 이익 복잡하게 얽혀"
쪽방촌 살며 관찰한 빈곤층 연구서…신간 '서울의 심연'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여성 A씨는 여름이면 유난히 힘들다고 한다. 폭염을 참을 수 없어 방문을 열어두면 맨몸으로 누워있는 남성 거주자들을 봐야 해서다. 쪽방 거주 20년째인데도, 그런 남성들의 모습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남성들의 반쯤 벗은 몸은 남녀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공용화장실에서 샤워할 때 남성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던 기분 나쁜 기억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동자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쪽방촌이다. 철도 교통의 중심지인 서울역에 인접해 있다. 후락한 동네에는 허름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그곳에 약 1천명이 모여 산다. 사회학자 탁장한은 2019년부터 그곳을 연구하면서 거주자들, 사회복지사, 종교인 등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다 2022년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는 아예 동자동 쪽방촌에서 지내며 200여명의 거주자를 만났다. 그곳에서 싸우고, 놀고, 도움을 주고받는 등 그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최근 출간된 '서울의 심연'은 저자의 빈곤층 연구서이자 오랜 시간을 두고 발품을 팔며 빈자들을 관찰한 성실한 르포다.

 

저자에 따르면 쪽방 건물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강한 냄새를 풍긴다. 낙후된 건물에 퍼진 짙은 곰팡내, 담배 냄새, 관리되지 못한 공용 화장실 냄새가 뒤섞여 특유의 악취를 뿜어낸다. 코를 잡고 방에 들어가 불을 끄면 수백마리의 바퀴벌레가 나타났다가 불을 켜면 다시 사라진다. 빈대와 벼룩은 소독해도 좀비처럼 재등장한다.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사생활도 보장되지 않는다. 한밤에 기침 소리마저 선명히 들려 불면증을 호소하는 거주자들이 많다. 녹지 관리 담당자에 따르면 쪽방촌 내 공원 화단과 쓰레기 봉지에서 악명높은 수면제인 스틸녹스(졸피뎀)가 다량으로 발견되곤 한단다.

 

"요 동네는 약 없으면 시체라니까요. 다들 눈 풀리고 골골대는 거 안보여요?"(쪽방촌 거주자 B씨)

건물 내에는 폐쇄회로(CC)TV가 없어 도난도 잦다. 그래서 절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방이 몇 호인지 알려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여름에는 비가 새고, 겨울에는 계단이 얼어붙어 낙상 위험이 높다. 보일러 동파는 빈번한 일이다. 지진이라도 나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건물 외관과 화재에 취약한 구조를 언급하는 건 사치에 가까울 정도다.

 

 

시설만 낙후된 게 아니다. 폭력에 노출되기도 쉽다. 세입자 간 내부 갈등, 건물주·관리자와의 갈등, 조악한 주거 환경이 중첩되면서 거주자들이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동자동 쪽방촌에선 살인미수를 포함한 강력범죄가 연 1~2차례씩 발생한다. 자잘한 폭력 사태는 일상이다. 거주자 C씨는 쪽방촌이 일종의 "무법지대"라고 토로한다.

"이 쪽방촌이라는 작은 동네는 여기 사람들끼리 마음대로 싸우고 서로 죽일 수 있는 곳으로 국가가 계획해 둔 곳 같아. 다른 데 가서 난동 피우지 말고 여기서 니네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이처럼 악조건에도 거주자 대부분이 쪽방촌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주거비가 싸고, 각종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17만∼18만원짜리 아주 싼 방도 있지만, 주거비는 대체로 보증금 없이 30만원 안팎이다. 서울 아파트 평균 월세가 100만원, 평균 보증금 2억2천만원을 웃도는 것에 견주면, 매우 저렴한 편이다. 여기에 서울시 등의 각종 지원을 생각하면 실제 주거비용은 더 내려간다. 소득 인정액이 중위소득 48% 이하면 주거급여를 최대 34만1천원까지 받을 수 있고, 이 밖에도 상황에 따라 생계급여, 전기·수도·가스요금 할인, 식권 및 생수 지원, 기업체 후원 등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왜 다들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줄 알아? 뭐 가면 고독하다는 얘기를 하지? 근데, 진짜는 뭐냐면 여기만큼 물품을 넉넉하게 자주 주는 데가 없어서 그래."(쪽방촌 거주자 D씨)

 

 

사회 복지 시설인 쪽방상담소, 사회운동단체인 사랑방, 종교기관인 교회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원하는 점도 거주자들을 유인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쪽방촌 유인 또는 정착을 발생시키는 힘인 구심력이 이주를 발생시키는 힘인 원심력에 비해 절대적으로 강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거주자들은 쪽방촌 탈출을 꿈꾼다. 줘도 돌아오는 게 없는 이웃에 대한 불신, 몸이 아프거나 약해지면 주먹 센 사람들에게 무시와 폭력을 당하는 공포, 지척에서 연쇄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두려운 상황, 술·담배·약으로 버텨내며 잃는 건강, 폐소공포증, 극강의 더위와 추위 등 악조건이 넘쳐나서다.

저자는 "거주자들은 일선 기관들의 수많은 지원으로 '빈곤층의 천국'을 경험한 후에도 쪽방촌을 여전히 '버림받은 땅', '창살 없는 감옥'으로 지칭하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만났던 200여명의 쪽방 거주자 중 그 누구도 그곳이 자기 인생의 종착역이 되기를 바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쪽방촌을 회고할 때면 항상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묘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빈곤의 도시에는 해악과 이익이 복잡미묘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송광호(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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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2024-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