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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식2024-07-04 13: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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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이승만기념관 절대 안돼”...불교계의 이유있는 뒤끝
내용

 

입력2024.07.04. 오전 10:02

 

성탄절 공휴일로 정하고
기독교방송 제일먼저 허가
불교계엔 토지 빼앗고
8차례 유시통해 분열 조장

 


1948년 7월 20일 국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7월 24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중앙청(옛 조선총동부)광장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복권 운동의 일환인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놓고 불교계가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최근 “반(反)민주적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반대한다”며 조목조목 이유를 들며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조계종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며 3·15 부정선거를 자행하였고, 결국 수많은 국민의 목숨이 희생된 4·19 항쟁을 통해 하야했다”며 “헌법에도 이승만의 불의를 명시했다”고 강조했다.

앞서 조계종은 지난해 11월에도 중앙신도회 명의로 “한국 불교를 분열시키고 박해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다른 곳도 아닌 조계종 총무원과 태고종 총무원 청사 사이에 건립한다는 건 한국 불교에 대한 큰 모욕”이라고 반발했다. 올해 2월에는 서울시의회 시정 질의에서 불교계를 설득해 송현광장에 기념관을 설립하겠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발언에 대해 “불교계를 우습게 여기는 몰상식한 행위”라며 즉각 반발했다.

조계종이 이처럼 한 사안을 놓고 격정적인 비난을 퍼붓는 일은 이례적이다. 불교계는 왜 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결사반대하고 나오는 걸까. 우선 유력 장소로 검토되고 있는 송현광장이 조계사와 태고종 인근이라는 점이 불쾌하다는 입장이다.

송현동의 열린송현녹지광장은 대한항공 소유였던 땅으로 2019년 한진그룹의 자금난으로 서울시 소유가 됐다.이건희 미술관이 지어질 곳으로 익히 알려진 경복궁 바로 옆 공간이다. 불교계는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국유지”라며 공과가 엇갈리는 인물의 기념관이 들어서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불교계의 강력 반대 기저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이 작용하고 있다. 자현스님은 유튜브에서 “성탄절을 공휴일로 만들고, 개신교 선교의 발판이 된 군종제도를 도입한 것, 또 (지상파보다 먼저) 기독교 방송을 허가해 준 사람이 이승만”이라고 말했다 실제 투옥중 신앙을 받아들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친개신교 정책을 폈다. 1954년 한국 최초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국과 1956년 극동방송국 설립에 특혜를 줘 선교 인프라의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반해 불교방송이 개국한 것은 1990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크리스마스는 1949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됐지만 부처님오신날(옛 석가탄신일)이 지정된 것은 그로부터 26년 후인 1975년이다. 불교계 첫 군종장교가 탄생한 것은 1968년이다. 모든 제도의 혜택이 개신교보다 상당히 늦은 셈이다. 이 사이 개신교 인구는 수십만에서 수백명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불교계에 대해서 우회적인 탄압 정책을 펼쳤다. ‘왜색불교를 없애고 불교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내린 유시들은 결과적으로 승단의 분열과 불교의 자멸을 유도했다.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지난 2~4일 서울 동국대 일원에서 열린 한국교수불자대회 시사섹션에서 발표한 ‘이승만 정부가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과 극복 방안’을 통해 “이승만의 유시로 한국불교는 유혈 난투의 전쟁터로 변했다. 이로 인해 한국불교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승단분열’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면서 “이러한 이승만의 행위는 기독교 우위의 종교정책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마성 스님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0일을 시작으로 불교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유시’를 1955년 12월 8일까지 총 8차례 발표했다. 스님은 “8번의 유시가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정치적 국면 전환을 요구 받는 고비 때나, 1인 독재를 위한 정치적 행보가 필요할 때마다 이뤄졌(하춘생)”으며, 이는 “개헌과 종신 집권에 필요한 이승만 자신의 이미지 구축이라는 정치적 복선이 깔려있다(김경집)”라고 역설했다.

일제강점기 결혼한 스님인 대처승이 급증하자 이승만 정부는 ‘대처승을 절에서 물러가라’라는 명분 아래 정화 유시를 내렸다. 이로 인해 비구와 대처의 다툼이 심해졌으며 소송전이 난무했다. 이 과정에서 대처승들은 자신들의 사찰과 땅을 헐값에 매각했다. 비구 중심의 조계종단은 1962년 탄생했고, 뒤이어 대처승들이 모여 태고종을 만들었다. 한 스님은 “이뿐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으로 불교계가 갖고 있던 땅들이 대거 수용돼 절반 이상 토지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일반에 공개된 경복궁 인근 송현광장. 서울시는 이곳에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검토하고 있어 불교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매경DB>

 

 

매일경제

이향휘 선임기자(scent200@mk.co.kr)

 

편집인2024-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