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슬픔이 알알이 맺힐 때….”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옛 ‘학전’ 소극장 앞길. 고 김민기의 유해가 있는 운구차에 유가족이 탑승하자 누군가 고인의 대표곡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극장 앞에 두 겹 세 겹으로 늘어선 추모객은 큰 소리로 흐느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잠잠했던 빗방울이 덩달아 갑작스럽게 굵어졌고, 수십 명의 사람들 가운데서 외침이 터져나왔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학전 대표이자 가수 김민기의 발인식이 24일 오전 8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별도 영결식 없이 엄수됐다. 유가족은 장지 천안공원묘원으로 향하기 전 고인이 33년간 일군 학전 소극장에 들렀다. 일주일 전 헐린 ‘학전’ 간판 대신 자리 잡은 ‘아르코꿈밭극장’ 글자 아래 영정과 위패를 놓고 일동 묵념했다. 김민기가 운영하다 경영난으로 폐관한 소극장 학전은 17일 정부(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김광석 노래비 앞은 시민들이 고인을 기리며 두고 간 소주, 막걸리와 국화꽃다발로 즐비했다. 유족은 묵념 후 영정을 안고 고인이 생전 돌봤던 지하 소극장을 잠시 둘러봤다. 학전에서 연기 인생을 시작하며 ‘독수리 오형제’로 불렸던 배우 설경구와 장현성은 참아보려는 듯 입술을 굳게 깨물었으나 터지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배우 오지혜, 방은진은 얼굴을 감싼 채 오열했다. 그밖에 황정민, 박학기, 이적 등 학전이 배출한 배우와 가수들이 고인을 기렸다.
운구차가 떠난 뒤에도 추모객들은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학전의 대표 레퍼토리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한 적 있는 색소포니스트 이인권 씨는 거리 한복판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김민기의 히트곡 ‘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했다. 이에 울음은 다시 파도처럼 번졌다. “가족장을 하시기로 했으니 우리는 여기서 선생님 보내드리겠습니다. 마지막까지 감사합니다.” 장현성은 힘겹게 입을 떼 이와 같이 말한 뒤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시민들도 추모에 동참했다. 대학로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소모 씨(50)는 “마지막을 기리고자 일부러 집을 일찍 나섰다. 대학로의 소나무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2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 꿈밭극장(옛 학전)에서 열린 고 김민기의 노제에서 고인의 영정이 놓여져 있다. 2024.7.24. 뉴스1
고인은 노래 ‘아침이슬’ 등으로 1970, 80년대 군부 시절 ‘청년 정신’을 심어줬다. 소극장 학전에 올린 창작 뮤지컬로 설립해 대학로의 공연예술 문화를 이끌었다. 위암 4기로 투병한 끝에 21일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스스로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머무르며 돕는 ‘뒷것’을 자처했다. 고인은 “나를 가지고 뭘 안 해도 된다”는 말을 남겼다. 죽고 나서도 ‘뒷것’이길 바란 것.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