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택시 운전사] 택시에서 본 우리 사회의 경제적 격차와 차별
▲ 유흥주점 밀집거리의 모습.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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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가까운 밤이었다. 강남의 룸살롱 앞에서 택시에 오른 손님은 술에 제법 취해 보였다. 정체 풀린 길은 한산했지만 고질적인 좌회전 정체구간에서 몇 번 신호를 기다렸다. 도착까지 20여 분 그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수백만 원짜리 술을 먹었고, 사업은 그럭저럭이고, 몇 주 후 골프 약속을 상기시키는 동안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드를 내밀면서 요금을 확인한 그가 평소보다 2000원 정도가 더 나온 것 같다는 푸념을 했다. 앱에서 자동연동된 내비게이션을 따라왔다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차 문이 '꽝'하고 닫혔다. 그는 비틀거리며 아파트 출입구를 향했다.
집에서 함께 밥을 먹던 아내와 아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숟가락을 든 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백만 원 술 값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겨우 택시비 2천 원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하지만 골똘히 생각해 보니 룸살롱과 택시는 엄연히 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회적 비용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통념상 룸살롱의 적정비용과 택시의 적정비용이 따로 있고 그 비용의 합리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감정적 반응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같은 돈이라도 룸살롱에서 지불되는 비용의 임계점과 택시에서 지불되는 비용의 임계점이 서로 다르다. 우리는 룸살롱에서는 몇 백만 원짜리 술을 당연한 비용으로 생각하지만 평소보다 2000원을 더 택시비로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닥치면 부당함을 느낀다.
그는 그걸 내게 푸념으로 표현했다. 늦었지만 (2000원이 더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기타 변수에 대한 합리적 평가는 집어 치우고) 나는 술에 취한 그가 가졌던 부당함만큼은 이해하기로 했다.
돈은 주인의 생각을 쥐고 흔든다
▲ 호텔 프론트의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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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도 서사가 있다. 같은 돈도 (벌든 쓰든)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육하원칙에 따라 그 무게와 개념은 천양지차다. 예를 들어 룸살롱에서 가져 온 2000원과 택시에서 가져 온 2000원을 저울 양쪽에 올리면 한쪽은 깃털이 되고 다른 한쪽은 한 덩이 납이 된다.
그리고 어떤 돈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물화되어 사람의 관계를 왜곡시킨다. 30년 전 지방에서 호텔리어로 일을 할 때였다. 당시 사회통념상 호텔 팁은 천 원이었다. 물론 당시 호텔은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부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사회통념보다는 부자들 세계의 통념이라는 개념이 진실에 가까웠다.
당시 호텔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은 전문직 직업을 가졌거나 회사를 가졌거나 아니면 조폭이거나 하는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팁을 주는 방식이나 금액에서 개인의 성향뿐만 아니라 돈을 버는 방식 그리고 그가 몸담고 있는 직업세계의 윤리까지도 발견하게 된다.
팁 문화가 익숙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더군다나 부가세 10%가 모든 요금에 붙어 있다는 불온한 고지를 호텔 내 어디서든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는 상황에서 팁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그런 발견이 더 쉬웠을 수 있다.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들은 매번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중한 방식으로 정확하게 가끔은 정말 얄미울 정도로 1000원을 넘지 않는 팁을 줬다. 하지만 주로 건설 관련 사장 또는 임원들이나 조폭들이 주는 팁은 방식이나 금액이 사회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번 팁을 줄 때마다 1000원이 아니라 1만 원짜리를 꺼내던 건설회사 사장이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호텔 커피숍에 들르던 그가 나타나면 직원들은 통 크게 팁을 주는 그를 반기는 게 아니라 서로 눈짓을 하며 짜증을 내고 기피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근무 중인 호텔 웨이터나 웨이트리스를 부를 때 '야'라고 했고 이름이 김수정인 직원에게는 '수정아'라며 직접 이름을 불러댔다. 조폭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그들은 1만 원이라는 통념을 벗어난 팁 안에 위계와 서열을 함께 욱여넣고 그 힘을 막말로 행사했던 것이다. 그것도 평소에 그가 월급 주는 자기 직원이나 부하를 대하는 방식과 같았다.
어떻게 아느냐면 가끔 호텔 커피숍으로 그를 알현(?)하러 조심스럽게 나타난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그의 말과 태도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분은 좀 극단적이긴 했지만 내가 호텔에서 근무한 2년 동안의 경험으로 팁 안에 내재된 직업 세계는 경중은 있되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30년이 흘러 지금은 볼 수 없는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각각의 돈이 지닌 서사의 원천은 그 주인이 벌어들인 방식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 기준을 노동이라 생각했다. 단지 몸을 쓰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 안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이 흘린 땀으로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하게 임했는지가 그 돈에 새겨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돈을 내보내는 방식과 태도 역시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쉽게 돈을 벌면 쉽게 돈을 쓰고 어렵게 돈을 벌면 함부로 쓰지 않는다. 가볍게 돈을 벌면 생각이 가벼워지고 무겁게 돈을 벌면 진중하고 깊어진다. 돈은 일상뿐 아니라 그 주인의 생각도 쥐고 흔든다.
돈이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부자를 염원한다. 부자들이 가진 돈의 서사가 사회를 잠식하고 통념을 지배하고 당대의 상식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신자유주의 안에 포획되어 있고 우리 사회의 부자들은 강남에 산다.
'불로소득'이 상식이 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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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아파트 매매가가 파죽지세로 오르며 5년 10개월여 만에 최대 주간 상승 폭을 나타냈다. 한국부동산원이 7월 25일 발표한 '7월 넷째 주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주 서울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 대비 0.30% 상승하며 18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사진은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시내 아파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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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핵심은 금융이고 강남의 신화는 부동산이다. 돈이 돈을 벌고 아파트가 아파트를 낳는다. 진득한 땀 한 방울 없는 불로소득이 사회를 잠식하고 통념을 지배하고 당대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아파트로 부를 이룬 강남의 부자들이 가진 돈의 서사는 가볍고 천박하다. 빌거(빌라거지)와 휴거(휴먼시아 임대아파트에 사는 거지)와 엘사(LH임대아파트 사는 사람들)라는 말이 어린아이들과 어른들 입에서 함부로 떠들어진다.
그 신조어의 발로가 아파트값 하락을 우려하는 천박한 시민의식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아파트값 때문에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사는 멀쩡한 사람들을 거지로 만드는 사회가 비정상임은 상식이지만, 시대의 반영인 그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당대의 상식으로 유효하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사회적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불로소득에 대한 도덕적 임계점을 상실한 우리 사회에 닥친 만연한 현실은 포기와 좌절이고 차별과 격차에 대한 무관심이다. 집이 없는 젊은 부부는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적은 월급은 작은 능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라는 능력주의가 판을 친다.
2023년 2월 19일 KBS 뉴스에 따르면 1980년 500인 이상 사업체 평균임금은 미만사업체보다 10% 높은 수준이었다. 80년대 후반이 되면 그 격차는 25%로, 2008년부터는 50%까지 벌어졌다. 노동자 4명 이하 기업과의 차이는 미국은 1.2배, 일본은 1.5배, 프랑스는 1.6배였고 한국은 3배였다.
같은 기사에서 그럼 이 차이는 정당한가에 대한 설명에서 '노동자 개인의 능력 차이가 아니라 기업체 규모의 차이로 인해 임금 격차가 발생한 거로 보인다는 의미'라고 했다. 2017년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제출된 '사업체 규모별 임금 격차 분석'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그 근본 원인을 '원·하청 간의 수익성 격차'라고 보았다.
개인의 능력보다 산업의 구조적 문제에서 차별의 맹아가 발아되었다는 결론이다. 성실하지 못해서 가난하다는 말, 일부만 유효하다. 더군다나 월급으로는 가망 없는 집값 때문에 가난이 가난으로 이어지고 부자로 태어난 자가 더 큰 부자가 되는 현실이다.
지난해 개인택시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된 볕 좋은 가을 한 낮이었다. 골프백을 트렁크에 실은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젊은 청년이 택시에 올랐다. 고급 빌라촌으로 가는 길에 건물주 할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내용은 사업하는 친구에게 시세보다 조금 싸게 할아버지 건물에 세를 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가 강조했던 건 친구가 미국에서 유학했고 사는 곳은 타워팰리스라는 말이었는데, 이는 마치 친구가 '그들'과 같은 부류임을 증명하는 마땅한 근거가 아니겠냐는 식으로 내겐 들렸다. 부럽다는 마음에 앞서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대화가 이명처럼 들려오는 바람에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돈 많은 할아버지나 부모님이 아니라면 유감스럽지만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기는 '글러 먹은' 세상이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의 운명을 살지만 부자인 자는 더 큰 부자로의 무한한 욕망을 펼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돈이 돈을 벌고 강남 경제의 중심인 아파트는 아파트를 낳는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회는 차별과 격차를 당연시하고 빌거와 휴거와 엘사라는 말이 거부감 없이 회자된다.
구조적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골치 아픈 주제는 언론에서 맥을 못 추고 그 자리를 대신해 요동치는 아파트 시세와 주택담보대출 금리의 변동성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클릭 수를 무한대로 끌어올린다.
최근 급격히 오르는 아파트 가격에 대해 정부가 대책을 강구 중이라는 뉴스를 접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정부도 자신의 가족들이 모여 사는 강남을 이기지 못했다. 누구든 제 손을 직접 부러뜨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세상에 가장 많이 유통되는 돈의 서사는 불로소득이다. 안타깝지만 차갑게 마주해야 할 현실이다.
하루 열 시간 노동으로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가난한 택시 운전사인 나는 그저 아이들의 꿈이 꺾이지 않는 세상을 소망한다. 나 또한 불로소득에 대한 일말의 욕망도 없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나로서는 가능성 희박한 일에 투신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 싫을 뿐이다.
지금 내게 허락된 생존을 위한 유일한 가능성이 바보처럼 땀 흘리는 노동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벌어들인, 저울에 올려진 돈이 비록 깃털처럼 가벼워 보일지라도 내겐 납 한 덩이의 무게감으로 묵직하게 가족을 향해 기울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