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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소식2023-06-06 14: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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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냉전으로 일어선 일본, 美中 갈등으로 재도약하나
내용

 

입력2023.06.06. 오전 3:10   수정2023.06.06. 오후 1:24

 

2023년 6월 5일 일본 도쿄에서 한 남성이 증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693.21포인트(2.20%) 급등해 1990년 7월 이후 최고 수준인 3만2217.43으로 마감했다./EPA 연합뉴스
일본 증시가 1990년대 초 ‘거품 경제’ 붕괴 이후 33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며 강력하게 부상(浮上)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고조되고 대만을 둘러싼 무력 분쟁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등 지정학적 불안이 고조되자 ‘안전한 아시아의 선진국’ 일본의 가치가 부각된 결과다. 미·중 대립으로 중국을 떠난 투자금이 아시아의 두 번째 대국인 일본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5일 일본 대표 주가 지수인 닛케이평균은 전일보다 2.2% 오른 3만2217엔으로 거래를 마쳤다. 올해 들어 최대 상승 폭이다. 닛케이평균이 3만2000엔 선을 넘어선 것은 1990년 7월 이후 처음이다. 연초 이후 닛케이평균 상승률은 25%로 한국(코스피 18%)·중국(상하이종합지수 0%) 및 미국 S&P500지수(12%)를 크게 뛰어넘는다.
 

/그래픽=백형선
싱가포르은행이 최근 보고서에서 ‘다시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표현한 일본 증시의 동력은 역설적이게도 냉전 종식 이후 최악으로 치닫는 국제 정세다. 반도체 등을 둘러싼 미·중 무역 분쟁, 대만에 대한 중국의 무력 대응 가능성, 러시아·우크라이나전을 둘러싼 서방과 반(反)서방의 대립 등 글로벌 사회의 동시다발적 악재가 일본 경제엔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투자은행 노무라의 크리스토퍼 윌콕스 기업금융 팀장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중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불확실성은 시장 규모가 크고 경쟁력 있는 기업이 많은 일본엔 오히려 득이 된다”며 “일본은 앞으로 5~10년간 투자자들의 최우선 선택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투자사 크레디아그리콜은 최근 일본의 경제 성장세 및 자금 유입의 속도를 토대로 닛케이평균이 3만5000엔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2023년 6월 5일 일본 도쿄 도심에서 한 남성이 은행 외부 증시 전광판을 보고있다./로이터 뉴스1
글로벌 악재가 일본의 호재로 작용한 대표적인 분야가 반도체다. 미국과 중국은 IT(정보 기술) 산업의 중추인 반도체를 두고 ‘맞제재’를 하며 충돌하고 있다. 파운드리 반도체 생산 1위 회사인 TSMC가 있는 대만은 중국의 위협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며 매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다. 반도체를 둘러싼 불안이 고조되자 첨단 기술을 갖췄으면서도 지정학적으로 안정된 일본의 장점이 두드러지고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공장 신설 발표가 잇따르며 일본 경제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지난 1분기에 대만 TSMC 주식을 6억1770만달러(약 8000억원)어치 팔고 일본 주식을 대거 사면서 “일본이 대만보다 좋은 투자처”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5일 일본 도쿄에서 한 남성이 증시 전광판이 표시된 은행 건물 앞을 지나고 있다. 이날 도쿄증권거래소 닛케이평균은 전 거래일보다 2.2% 오른 3만2217엔에 마감됐다. 이는 1990년 6월 이후 33년 만의 최고치다. /로이터 연합뉴스
일본 정부도 미·중 분쟁을 자국에 유리한 흐름으로 굳히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외국 반도체 생산 업체 및 연구 기관 7사 대표와 면담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한편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2조원에 육박하는 보조금을 주며 생산 시설 유치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미국은 한때 일본을 반도체 분야 경쟁자로 보고 무역 제재를 하기도 했지만 주요 협력국이었던 대만의 정세가 최근 악화하면서 일본과의 공조를 노골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며 “‘미국의 반도체 파트너 일본’으로서 입지가 굳어지면서 투자자들의 관심도 커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불안이 고조된 가운데 지난달 히로시마에서 G7(7국) 정상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안전한 투자처’라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킨 것도 일본으로의 투자 자금 유입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FT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방문까지 이끌어낸 G7 정상 회의를 통해 일본은 서방 자유 진영의 구심점인 동시에 안정적이고 충직한 공급망 허브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뒷줄 가운데)이 지난 5월 21일(현지시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국(G7) 정상회의 마지막 날 실무 세션에서 G7 세계 정상들과 함께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일본 증시 상승은 4월 이후에 이어진 외국인 순매수가 이끌었다. 4~5월 두 달 동안 외국인 순매수 금액이 6조1500억엔(약 57조원)에 달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본을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판단하고 투자를 늘리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 경제와 증시는 이전에도 세계가 분열할 때 성장하고 평화기에 정체되는 패턴을 보여 왔다. 냉전이 극에 달한 1960~1980년대 일본 경제는 급성장해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지만, 구(舊)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쯤부터 거품이 꺼졌고 이후 침체의 늪에 빠졌다. 1989년 말 3만9000엔에 육박하며 정점을 찍은 닛케이평균은 2009년 7000엔 선까지 하락했다가 미·중 무역 분쟁이 본격화한 2021년쯤부터 반등을 시작했다. FT는 “호황기엔 약점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일본의 저성장과 정체가 지금 같은 혼란기엔 장점으로 여겨진다”고 전했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sunghochul@chosun.com류재민 기자 fun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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