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우군서 정책 변화 예상
헝가리-폴란드 등은 농산물 분쟁
동유럽 이웃들 장기전 피로감 번져 1일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1위를 차지한 친러, 반미 성향의 야당 사회민주당 로베르트 피초 전 총리가 기자회견을 하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브라티슬라바=AP 뉴시스지난달 30일 열린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친(親)러시아 성향의 좌파 야당 스메르 사회민주당(SD)이 1위를 차지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면서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우군이었다. 나토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빨리 전투기를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반대’를 내세운 사민당의 총선 승리로 슬로바키아의 대(對)우크라이나 정책에 변화가 예상된다. 여기에 같은 나토 회원국인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전쟁 장기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나토 차원의 우크라이나 지원 노선에 균열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 “우크라이나에 탄약 보내지 않을 것”
1일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외신에 따르면 슬로바키아 사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22.94%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우파 성향의 ‘진보적 슬로바키아’는 17.96%로 2위를, 또 다른 좌파 정당인 흘라스는 14.7%로 3위를 기록했다. 사민당을 이끄는 로베르트 피초 전 총리(59)는 승리가 확정된 후 1일 기자들과 만나 “슬로바키아는 에너지 및 생활비 가격 급등 등 우크라이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지원 중단 입장을 재확인했다.피초 전 총리는 그동안 유세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단 한 발의 탄약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우크라이나 나치주의자와 파시스트들이 러시아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해 전쟁이 시작됐다”며 사실상 전쟁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주장해 온 우크라이나 침공 이유를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피초 전 총리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도 반대해 왔다. 앞서 슬로바키아 싱크탱크 글로브섹의 3월 여론조사에서 슬로바키아인 응답자의 51%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이 서방과 우크라이나에 있다고 답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선거 결과는 19개월 동안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수십억 달러의 군사 지원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면서 시급한 국내 사안에 예산을 써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가 커진 데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이번 총선에서 어느 정당도 과반 의석(76석)을 차지하지 못해 사민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 동유럽서 퍼지는 ‘우크라 지원 회의론’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회의론은 헝가리, 폴란드 등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서유럽보다 상대적으로 경제 구조가 취약한 이 지역에 타격이 컸던 데다 최근 농산물 수입 분쟁도 불거진 탓이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자국으로 유입되면서 밀, 해바라기씨유 등의 가격이 하락해 농민 반발이 커졌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발발 후 주요 곡물 수출길인 흑해 항구가 폐쇄되자 육로를 통해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인근 나라들로 수출을 늘려 왔다.
유럽연합(EU)은 5월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 대해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수입 제한 조치를 허용했다. 하지만 시장 왜곡이 사라졌다며 지난달 이 조치를 해제하면서 갈등은 커졌다.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는 ‘수입 금지’ 유지 방침을 밝혔고, 우크라이나는 이 3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이런 갈등 속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이전하지 않겠다고 맞섰고 헝가리 역시 반발했다. 대표적인 반(反)우크라이나 인사인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이번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승리한 피초 전 총리에게 X(옛 트위터)를 통해 “애국자와 함께 일하는 것은 좋다. 기대된다”며 축하했다.
CNN은 “전선이 교착될수록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 의지가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피초 전 총리가) 오르반 총리와 함께 유럽에 또 다른 반우크라이나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