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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식2023-04-21 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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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문명 발전할수록 폭력·불평등… “인간 본성은 악하다”
내용

 

입력2023.04.21. 오전 9:16   수정2023.04.21. 오전 9:31

 

게티이미지뱅크

■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필립 드와이어·마크 S 미칼레 엮음│김영서 옮김│책과함께

사회내 폭력·국가간 전쟁 등

역사적 근거 조목조목 대며

‘선함’ 주장 핑커에 정면반박

자본주의로 생활 편해졌지만

빈곤·혐오·성폭력 해결 못해

“천사들이 발딛기 두려운 세상”

 

2011년 역사학의 오랜 상식에 반하는 충격적 주장을 담은 책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핑커의 책은 특히 유럽 계몽주의 이후 전쟁과 폭력의 규모가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확산에 따라 이성과 계몽의 힘이 전 지구적으로 퍼지면서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쪽으로 바꾸어 왔다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는 핑커의 주장에 대한 역사학계의 전면 반박을 담고 있다. 필립 드와이어 미국 뉴캐슬대 교수, 마크 미칼레 일리노이대 교수, 대니얼 스메일 하버드대 교수 등이 참여한 이 책은 인류가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원시 사회에서 평화롭고 문명화한 현대 사회를 향해 진보해 왔다는 주장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핑커의 주장은 서구 제국주의가 퍼뜨린 폭력의 확산, 사회 내 약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의 지속성,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국가 후원의 대량 학살, 인류가 지구 환경에 가한 회복 불가능한 폭력 등 폭력의 다양한 양태를 철저히 무시한다.

역사학의 핵심 기술은 원천 자료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지식과 알 수 없는 지식을 비판적으로 판별하는 일이다. 그러나 핑커의 주장엔 별로 엄밀한 근거가 없다. 가령, 핑커는 오직 덴마크 베드베크 유적만 근거 삼아 선사시대에 대인 폭력과 살인이 만연했다고 성급히 주장한다. 그러나 수렵채집 사회가 훨씬 더 평화로웠고, 전쟁 행위는 신석기 혁명 이후 더 빈번해지고 정교화했다는 건 역사학의 상식이다.

중세 역시 피에 굶주린 폭력의 시대만은 아니다. 핑커는 스페인 종교재판을 중세 잔혹 문화의 예로 드나, 핑커가 인용한 이 분야 권위자 조제프 페레스는 이단 재판의 실제 처형률은 1.8% 정도로 사망자 수는 수백 명 규모라고 말한다. 핑커가 자유와 계몽의 눈부신 전개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하는 나치 유대인 학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채찍질, 낙인찍기, 공개 처형 등 신체형 대부분은 중세 때 크게 퍼져 있지 않았고, 근대 초기인 16∼17세기에 ‘이례적으로’ 증가했다 잦아들었다. 20세기가 오히려 국가 폭력으로 인한 대량 학살 시대에 가깝다. 20세기 전쟁 사망자는 약 1억2000만 명, 지난 5000년간 전체 전쟁 사망자의 무려 3분의 2에 달한다.

핑커는 서구 백인 문명과 자본주의를 본성상 선하다고 가정한 후 그 폭력과 불평등과 부정의를 약간 일탈로 서술한다. 그러나 폭력이 줄었다는 바로 그 시기에, 제국주의로 변모한 자본주의는 비서구 세계에 무참한 폭력을 행사하고 무고한 희생을 강요했으며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핑커는 비서구 세계 자료를 임의로 왜곡해서 야만과 위험을 과장하고, 식민주의를 계몽과 자유의 보편적·필연적 승리로 찬양한다. 피의 늪을 거닐면서 번영과 행복을 떠올리는 셈이다.

노예노동 역시 여전하다. 난민이 넘쳐나고 분쟁이 일상적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아랍, 남아메리카에서 강제노동은 여전히 흔하다.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사기당하거나 폭력에 시달리면서 생계 이상 보수를 받지 못한 채 일하는 이들이 전 세계 약 4000만 명에 달한다. 자본과 결합한 초국적 범죄 조직이 자행하는 이 끔찍한 폭력은 저렴한 물품, 저렴한 섹스를 공급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노예노동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와 결합하지 않은 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핑커는 경제 불평등, 즉 빈곤이 폭력의 한 형태임을 부인하고, 현재가 중세보다 자선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무자비한 시대란 사실도 무시한다. 그러나 빈곤은 눈부신 경제 발전에도 별로 해결되지 않은 심각한 문제다.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하고, 돈이 없어 거리로 나앉으며,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흔한가. 체제 내 인종주의, 즉 소수자에 대한 구조적인 폭력도 별로 줄지 않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수 서구 국가에서 경찰이 살해하거나 교도소에 수용한 소수자 숫자는 인구 비례 대비로 압도적이다.

현대 사회는 아직 “천사들이 발 딛기 두려워하는 세상”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폭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무분별한 낙관주의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과 착취, 증가 중인 여성과 아동 성폭력, 만연한 소수자 차별 등을 눈감게 하고 자칫 그에 대한 비판 정신을 무력화한다. 집단 따돌림, 혐오 발언, 사이버 폭력 등 새로운 폭력이 등장하고, 감정적, 심리적, 성적 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등 폭력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근본 문제’로 남아 있다. 688쪽, 3만8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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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202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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