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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식2023-05-29 12: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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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돈과 맞바꾼 시간, 나이든 부모는 아직도 자책한다
내용

 

입력2023.05.29. 오전 11:43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  어머니, 고강심씨.
ⓒ 전재천 포토디렉터


 
어머니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
너른 바다 혹은 깊은 숲,
가장 친한 친구이자 또 다른 나.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나에겐 이미 최초의 세상이 있었다. 어머니다. 280일 어머니 품 안에서 심장 뛰는 소리, 숨소리, 목소리를 느끼며 감각을 하나하나 일깨웠다. 태어난 순간 탯줄은 끊겼지만, 어머니는 늘 곁에 가까이 있었다. 기쁠 때 가장 먼저 달려오고, 힘들 때 부리는 온갖 응석을 다 받아주셨다.

걷다가 헛딛고, 넘어지고, 멀리 돌아가기도 하는 인생의 길. 어머니는 그 길을 나의 손 꼭 붙잡고 함께 걸어주셨다.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것 같은 한 사람. 그 어머니가 아이처럼 작고 연약해져만 간다. '우리 엄마 얼굴이 맞나.' 세월에 고생에 주름이 깊이 파여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 당신에게도 봄꽃처럼 화사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지금, 이 순간마저 지나가 버릴까 봐 두렵다.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 너른 바다 혹은 깊은 숲, 가장 친한 친구이자 또 다른 나. 그 위대한 사랑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도 보답할 길은 없으리라. 세상에서 하나뿐인 '엄마, 우리 엄마'.
 

▲  아버지, 황희수씨
ⓒ 류창현 포토디렉터


 
아버지
기댈 수 있는 단단한 언덕이자,
큰 산 같은 존재.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가며
무너져서는 안 되는.

아버지는 기댈 수 있는 단단한 언덕이자 큰 산 같은 존재였다. 부모에게 효성 지극한 자식이고, 아내와 자식들에겐 듬직한 남편이자 아빠, 사회에선 성실한 일꾼으로 살아야 했다. 지쳐도 쉬지 않고,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가며, 눈물이 나도 홀로 삼켜냈다. 큰 산은, 단단한 언덕은 무너져서는 안 됐다.

어린 날에도 아버지와 단둘이 있으면 침묵을 견디기 힘들 때가 있었다. 자상한데도 어렵고 친밀하면서도 서먹했다. 철없는 자식들을 혼낸 다음 날엔 그 '귀한' 바나나를 사와 말없이 건네고,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날에야 잠든 자식들의 뺨을 비비던 당신. 그 시절 아버지는 사랑하는 마음만큼 표현하는 법을 모르고, 가족과 가까이할 시간도 없었다.

언제까지나 우러러보아야 할 것 같던 아버지가 세월 따라 작아져만 간다. 평생 삶의 무게를 짊어진 어깨, 외로움이 비친 뒷모습을 바라보면 가슴이 저릿하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빠, 우리 아빠.
 

▲  흑백사진 속 젊은 날의 아버지, 황희수씨
ⓒ 굿모닝인천


 

▲  가끔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온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가게에서
ⓒ 류창현 포토디렉터


  
흑백사진 속 젊은 날의 아버지는 마치 영화배우 같다. 일흔을 앞둔 나이, 요즘 부쩍 머리카락이 빠져서 '아버지의 아버지'를 닮아간다며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어머니가 "그때나 지금이나 멋지기만 하다"라며 수줍게 웃는다.

1977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구 송림동에 있는 대성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직장 동료 남자 셋, 여자 셋이 만나 두 사람만 짝이 되었다. "그때는 아내가 참 예뻤는데, 그 곱던 사람이 어느새 육십이 훌쩍 넘었네요." 바라보는 눈빛에 애틋함이 가득하다.
 
175cm 키에 58kg 몸무게. "비쩍 말라서는, 어디 하루나 버티겠나"라며 공장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1973년 가을, 스무 살의 황희수(69)씨는 목재 회사 '이건산업'에 들어갔다. 출근 첫날부터 열두 자(尺) 크기 합판을 작업장 끝에서 입구까지 옮기는 작업을 종일 했다. 하루 12시간 근무하는 동안 오전 오후 딱 두 번 단 10분만 쉴 수 있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합판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하루 일이 끝나면 피로와 함께 뼈끝 녹아드는 고통이 몰려왔다. 사흘 만에 '다시는 나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수봉산 자락에 기댄 낮은 집엔 편찮으신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동생들이 자신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수저를 들 힘도 없던 그를 어머니가 눈물 흘리며 일으켜 주셨다. '내가 일해야 가족이 먹고산다.' 버텨내야 했다. 그렇게 그는 노동자의 삶으로 걸어 들어갔다.
 

▲  두 아들의 운동회를 보기 위해, 양복 차림으로 회사에서 학교로 달려온 아버지
ⓒ 굿모닝인천


 

▲  언제부터인가 작아져가는, 큰 산 같던 아버지의 뒷모습
ⓒ 류창현 포토디렉터


 

▲  빛바랜 사진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그날의 추억
ⓒ 전재천 포토디렉터


 

▲  젊은 날의 아버지와 어머니. 누구에게나 빛나던 시절은 있다.
ⓒ 굿모닝인천


 
너도나도 가난하던 시절, 그래도 내 몸 부리는 만큼 돈을 벌 수 있었다. 남들 몇 배로 일에 매달린 끝에 아버지는 작업반장이 됐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 넷'이었다. 빨간 모자를 쓰면서 육체노동에선 어느 정도 해방됐지만, 하루하루 생산량을 맞춰야 하는 스트레스로 신경이 늘 곤두서 있었다.

1987년부터는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 먼 이국땅으로 파견을 나갔다. 6개월에 한 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시간마저 회사 일에 빼앗겨 가족을 마주할 수 있는 건 잠든 얼굴뿐이었다. 떠나면 후회하고 다시 만날 날을 그리는 시간이 반복됐다. 처음 떠날 때 열 살, 아홉 살이던 두 아들은 어느덧 낯선 얼굴의 어른으로 자라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잘하지 못했어요. 지금까지도 마음이 쓰여요." 타지에서 번 돈을 꼬박 모아 보낸 만큼 쌓여가는 통장 잔고도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할 순 없었다. 가족을 위해서였을지라도 돈과 바꾼 그 시간을 아버지는 자책한다.
 
큰아들 황철성(45)씨는 어엿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그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부모님 덕분에 우리 형제가 이렇게 잘 자랐는걸요. 미안한 마음 안 가지시면 좋겠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만큼만 아이들에게 잘하고 싶어요." 마주보며 웃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서로를 닮았다.

"바쁘게 살아온 당신의 젊음에 의미를 더해 줄 아이가 생기고 / 그날에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 설레는 웃음은 빛바래 가지만 /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는 철이 없는 아들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 외로운 어느 날 꺼내 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 있네." - 김진호의 노래 '가족사진' 중에서
 

▲  꼭 잡은 부부의 두 손
ⓒ 전재천 포토디렉터


 

▲  꿈 많던 그날. 1980년대 초, 자유공원에서
ⓒ 굿모닝인천


 

▲  어느덧 함께 나이 들어가는 부모와 자식(가운데 큰아들 황철성씨)
ⓒ 전재천 포토디렉터


 

▲  함께이기에 아름다웠던 날들
ⓒ 전재천 포토디렉터


 
"지금도 예쁘지만, 우리 엄마 옛날엔 정말 미인이었네요." 화양연화(花樣年華),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절은 있다. 사진 속 젊은 날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 중년의 아들이 어머니에겐 여전히 '품 안의 자식'이다. "어릴 때는 언제 크나 했는데, 이제 아들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 아파요." 어머니는 아들 얼굴이 주름지는 건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그 곱던 당신 얼굴이 훌쩍 늙어가는 줄은 모른다.

1976년 봄, 열일곱 살의 고강심(65)씨는 전라남도 영광에서 인천으로 왔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공장 굴뚝 연기를 따라 인천으로 모여들던 시절이었다. 최정례, 당시 그의 이름이다. 일하기엔 나이가 어려서 친척 언니의 명의로 이건산업에 몰래 입사했다. 그땐 다들 그렇게 먹고살 길을 찾았다.

스무 살에 같은 공장에 다니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송림동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에 열 식구가 살고 있었다. 두 아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남편 혼자 벌이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공장 일부터 식당 일, 파출부 일까지 살아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몸을 썼다.

"평생 일만 했어요. 그래도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모두 힘들게 살았으니까요." 지난날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빛이 환하다. 열심히 일할 줄밖에 모르는 삶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없어서 힘들었던 일보다 함께여서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다.
 

▲  살아갈 힘을 주는 따뜻한 한 끼, 어머니의 닭알탕
ⓒ 류창현 포토디렉터


 

▲  송림동 닭알탕 골목, 어머니의 땀과 젊음이 녹아 있는 자리
ⓒ 류창현 포토디렉터


  
"가게가 내 숨통이고, 손님들 얼굴은 곧 내 얼굴이에요."

송림동 현대시장 앞, 닭알탕 골목. 퇴근길 한잔 생각에 들른 직장인들, 주머니 가벼운 젊은이들, 추억을 찾아온 단골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모습에 위로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 곳. 이 골목 한편 오래된 가게가 어머니를 숨 쉬게 하고 지탱해 주는, 어머니의 자리다.

1997년 가게 문을 열었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남편 사업이 어려울 때였다. 밥도 팔고 술도 팔아야 하는 일이다. 3개월 정도만 하다가 그만두려고 했다. "하루하루 주어진 대로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세월 가는 줄도 몰랐지요." 그 시간이 어느덧 26년이다.

닭알탕은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고 빈속을 채우던 소울 푸드였다. 저마다 삶에 허기진 사람들이 어머니가 손수 해주신 음식으로 배부른 위로를 받았다. 하나 정작 커가는 아이들에겐 따뜻한 밥 한 끼 해줄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해야 했던 바쁜 엄마에게 그 시절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남았다.

"돌아가신 엄마의 길을 똑같이 가는 것 같아요. 엄마도 생전 힘들다는 말없이 자식들 걱정만 했거든요. 무슨 말 하면 가만히 웃기만 하고..." 부모가 된 자식도 어머니 앞에선 보듬어야 할 철부지 어린아이이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이 뭐라든, 언제나 곁에 있을 내 편.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

"가족사진 속에 미소 띤 젊은 우리 엄마 꽃피던 시절은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내가 깨끗이 모아서 당신의 웃음꽃 피우길" - 김진호의 노래 '가족사진' 중에서
 

▲  열심히 일할 줄밖에 모르던 삶. 그사이 훌쩍 나이 든 어머니, 고강심씨. 그래도 표정은 환하다.
ⓒ 전재천 포토디렉터


  
► 취재 영상 보기 (https://youtu.be/BXh1cmIP_5o)
 

▲  굿모닝인천 5월호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의 어머니, 아버지' 유튜브 섬네일
ⓒ 굿모닝인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3년 5월호에도 실립니다.

글 정경숙·사진 류창현 전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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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2024-10-31
편집인202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