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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식2023-07-04 11: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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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항체 치료제 ‘특허 우산’ 사라졌다…韓 바이오에 “기회 열렸다”
내용

 

입력2023.07.04. 오전 11:01

 

 항체 치료제 놓고 10년 다툰 암젠·사노피
지난달 美 대법원 판결로 사노피 승소 확정
항체 치료제 특허 기재 요건 훨씬 엄격해져
후발 주자인 한국 바이오 기업 입장에선 새로운 기회


미국의 다국적 제약사인 암젠(Amgen)과 사노피(Sanofi)가 10년 가까이 벌여온 항체 치료제 특허 다툼이 지난 5월 마무리됐다. 결과는 사노피의 승리였다. 암젠이 사노피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한 지 9년 만이었다.

국내 언론은 암젠과 사노피의 특허 분쟁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한국 제약사나 바이오 기업이 얽혀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미국 대법원 판결을 전하는 단신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몇몇 제약 전문 매체만이 결과를 짤막하게 소개할 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제약사 암젠 본사의 모습./AFP 연합뉴스


하지만 제약업계뿐 아니라 특허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은 항체 치료제 분야의 판도를 바꿀 중요한 기점이라고 평가가 나온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새로운 치료 대상 항원을 처음 밝혀냈다는 이유만으로 관련된 항체에 대한 모든 특허권을 주장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국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항체 발명에 대한 명세서 기재 요건이 엄격해지면서, 기존에 항체 관련 특허들도 언제든지 특허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제약·바이오 분야의 후발 주자인 한국 기업 입장에선 나쁠 게 없다. 특허법인 세움의 류민오 변리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인해 타겟 항원에 대한 항체를 독점하는 특허를 확보하는 게 사실상 어렵게 됐다”며 “항체 의약품 중 최고의 블록버스터인 PD-1에 대한 원천 특허도 이번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무효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매출 수조원 내는 콜레스테롤 치료제


암젠과 사노피는 혈액에서 나쁜 콜레스테롤을 줄여주는 ‘PCSK9′이라는 단백질에 결합하는 항체를 놓고 다퉜다. PSCK9은 혈중 저밀도 지질단백질(LDL)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는 LDL 수용체에 결합해 이를 분해하는 체내 단백질이다. PCSK9과 LDL 수용체의 결합을 차단하면 LDL 수용체가 분해되지 않고 LDL 콜레스테롤은 혈액에서 제거된다.

암젠은 PCSK9에 결합해 LDL 수용체와의 결합을 차단하는 항체를 개발했고 관련 특허를 냈다. 암젠은 이를 이용한 콜레스테롤 치료제인 ‘레파타’를 출시했는데 작년 말 기준으로 매출이 13억달러(약 1조7000억원)에 달했다.

문제는 사노피도 비슷한 방식의 콜레스테롤 치료제인 ‘프랄런트’를 출시하면서 시작됐다. 프랄런트 역시 작년 말 기준으로 매출이 4억6700만달러에 달했다.

암젠은 미국 델라웨어 지방법원에 프랄런트가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1심 법원은 암젠의 손을 들어줬다. 사노피는 즉각 2심 법원에 항소했는데, 2심 법원은 사노피의 손을 들어줬다. 암젠 특허가 항체 발명에 대한 명세서 기재 요건을 지키지 못해 무효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1심 법원은 재심리를 거쳐 사노피가 암젠의 특허를 침해한 게 아니라고 다시 판단했고, 2심 법원과 대법원까지 이어진 끝에 지난 5월에야 사노피의 승소가 최종 확정됐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암젠이 관련 특허를 먼저 냈는데 왜 특허 소송에서는 진 걸까. 바로 이 부분이 이번 특허 소송에 전 세계 바이오 업계가 관심을 가진 이유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다국적 제약사 사노피의 본사 모습./REUTERS 연합뉴스

26개 항체 실험 결과만으로 모든 항체 특허 인정할 순 없다


암젠과 사노피의 특허 분쟁은 기본적으로 PCSK9의 결합을 저해하는 항체에 관한 것이다. 암젠은 특허 청구범위에서 항체가 결합하는 표적 단백질(PCSK9)의 특정 에피토프(Epitope)와 PCSK9과 LDL 수용체의 결합을 차단하는 기능으로 항체를 한정했다. 이때 에피토프는 항체가 항원에 부착하는 부분을 말하는데, 이 에피토프가 잘 설정돼야 항체를 이용한 치료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암젠은 자신들이 항체를 어떻게 발명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명세서에 PCSK9에 결합하는 26개의 항체에 대해 적었다. 26개의 항체가 어떻게 PCSK9에 결합했는지에 대한 실험 결과를 명세서에 적었다. 26개라고 하면 충분히 많아 보이지만 사실 항체의 세계에서 26개는 사막의 모래알 같은 수준이다.

분자생물학자인 그레고리 윈터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암젠의 주장은 바닐라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만든 뒤 열량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자 모든 열량 없는 디저트를 자신들이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윈터 교수는 항체 치료제에 대한 연구로 201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석학이다. 미국 대법원 역시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대법원 역시 판결문에서 은하계에 있는 별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항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암젠 변호인단은 항체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한 막대한 투자 비용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특허를 인정해야 한다고 맞섰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체 치료제 특허 독점 어려워졌다


그동안 미국 대법원은 항체 발명에 대한 명세서 기재 요건을 판단할 때 특허권자에게 유리한 입장을 보여왔다. 새로운 치료 타겟 항원을 규명했다면 그에 대한 원리와 개념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항체에 대한 발명의 권리를 특허권자에게 인정해줬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로 항체 치료제에 대한 특허권자의 특허 독점이 쉽지 않아졌다. 특허가 인정받으려면 기술자가 자신의 발명을 재현할 수 있도록 충분하고, 명확하고, 간결하고, 정확하게 기술해야 하는데, 항체 몇 개의 제조예를 명세서에 기재하는 것만으로는 특허 독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류민오 변리사는 “선도 그룹의 특허 명세서가 공개되면 그걸 본 다른 그룹에서 다른 구조를 갖는 항체를 개발하는 식으로 선도그룹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고도 항체 의약품을 만들 수 있다”며 “넓은 권리범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제조·실험예를 준비해서 명세서 기재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생명공학 분야의 혁신적인 기술은 대학이나 비영리연구소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후 개발된 기술이 제약사에 기술이전이 되면서 신약으로 개발되는 방식인데, 학교나 비영리연구소는 제한된 예산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처음 특허를 출원할 때 개념 증명 차원에서 몇 개의 실험예만 제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이런 소수의 실험예만 제출하는 방식으로 특허를 확보하는 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전략이 될 수 있다. 당장 대법원 판결 이전에 등록된 많은 항체 특허가 무효심판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항체 치료제에 대한 바이오 업계의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이런 판결이 나오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항체치료제는 우리 몸의 면역 세포를 활용해 바이러스나 암세포 같은 ‘적군’을 물리치는 방식이다. 항체를 만드는 면역세포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기존 항체를 강하게 만들어 바이러스 사멸 효과를 높이는 식이다. 마치 유도 미사일처럼 목표만 공격하기 때문에 부작용도 덜하다.
 


최초의 항체치료제가 나온 건 1986년이지만, 최근 들어 성장세가 가파르다. 지난 2021년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100번째 항체 치료제를 승인하기도 했다. 항체치료제는 이제 암 치료와 자가면역 질환, 류머티즘 관절염 등 온갖 분야에 쓰이고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알츠하이머 치료제인 ‘레카네맙’ 역시 항체 치료제다.
 

한국 바이오 기업들에겐 기회


이번 판결은 국내 제약사나 바이오 기업들에게는 판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암젠처럼 다국적 제약사가 광범위한 청구범위로 자신들의 항체 특허를 보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판결로 이런 보호막의 범위가 확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류민오 변리사는 “국내 바이오 벤처가 원천 특허의 존재 때문에 항체 개발을 포기하거나 개발 일정을 특허 만료 이후로 연기하는 등의 소극적인 전략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번에 새로 확립된 항체 발명에 대한 명세서 기재 요건을 분석하면 (항체 특허가) 잠재적인 무효 사유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국에서 특허 무효 소송을 제기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해도 된다”고 말했다.

원천 기술을 개발한 다국적 제약사에 의해 검증된 타겟 항원에 대한 새로운 항체와 접근법을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리스크를 분산하면서도 검증된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국내 기업들도 똑같이 보유한 특허가 공격받을 수 있는 만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류민오 변리사는 넓은 권리범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합물을 항체를 최대한 많이 스크리닝해서 약효 데이터를 준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특허 출원 일정을 실험 스케쥴에 맞추고 실험 데이터를 명세서에 추가할 수 있는 1년의 우선권 주장 기한을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치료 타겟에 결합하는 항체의 CDR(상보성 결합부위) 영역을 아미노산 서열식으로 작성해 최대한 많은 서열을 포괄하고, 각 에피토프마다 항체를 별도로 스크리닝해서 별개 특허로 출원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류민오 변리사는 “연구 전략과 특허 전략이 서로 긴밀하게 작동돼야 하기 때문에 개발 초기부터 연구팀과 특허 전문가가 함께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허법인 세움의 류민오 변리사./특허법인 세움
 

이종현 기자 i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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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202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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