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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소식2023-02-14 12: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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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말고 한국 정부의 사과를 달라"…어렵게 웃은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인터뷰]
내용

 

입력2023.02.14. 오전 4:31

 

퐁니·퐁넛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 후 첫 언론 인터뷰

베트남전 당시인 1968년 2월 12일 중부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씨가 사건 발생 꼭 55년 만인 12일 디엔반현 자택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한국 법원의 1심 판결 소회를 밝히고 있다. 디엔반=허경주 기자

“시간을 쪼개 가며 한국을 방문해 열심히 증언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정부의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인정과 사과를 원할 뿐입니다.”

가족이 한국군에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여덟 살 소녀가 웃음을 되찾기까진 반세기가 걸렸다.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63)씨의 얘기다. 12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 다낭에서 남쪽으로 25㎞ 거리인 디엔반현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7일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피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첫 판결이 나온 이후 탄씨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다. 2020년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 것이 탄씨다.

인터뷰 당일은 탄씨 가족이 살해당한 1968년 2월 12일로부터 딱 55년 되는 날이었다.
 

한국군, 55년 전 탄씨 마을 주민 74명 학살



탄씨의 얼굴엔 깊은 주름이 파였다. 머리카락도 하얗게 셌다. 그러나 '그날'의 악몽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날 오전 퐁니 마을에 한국군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방공호에 숨은 탄씨와 언니, 남동생, 이모, 사촌동생을 위협해 끌어냈다. 총격을 가하고 흉기를 휘둘렀다. 가족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남동생은 여섯 살이었고, 사촌동생은 8개월 아기였다. 탄씨 어머니도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같은 날 마을 주민 74명이 사망했다. 창자가 밖으로 쏟아질 만큼 참혹한 부상을 입은 탄씨를 미군이 병원으로 옮겼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탄씨는 증언을 망설였다. 한국 남성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뒤늦게 용기를 냈다. 2015년 한국을 찾아 피해사실을 알렸고, 2020년 4월 “내가 곧 학살의 증거”라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1968년 베트남전 참상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린애 거짓말 아냐?" 차가운 시선에 상처



서울중앙지법은 7일 "원고에게 배상금 3,00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과정은 험난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건 "거짓말하는 게 아니냐"라는 한국인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2015년 4월 첫 한국 방문을 떠올리면서 탄씨는 눈물을 훔쳤다. 서울에서 열린 민간인 학살 사건 증언 기자회견장은 전쟁터 같았다. 각종 군인단체 회원들이 군복 차림으로 몰려와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군인)은 참전군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사를 중지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그들이 사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첫마디가 ‘여덟 살짜리가 뭘 안다고’, ‘여덟 살 때 이야기라 믿을 수 없다’는 거였죠. 제가 원한 건 그냥 ‘미안하다’는 한마디였는데...”

한국 정부의 일관된 부인도 상처를 키웠다. 학살 사건을 공식 인정한 적 없는 정부는 재판 과정에서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이 가해자"라거나 "민간인 학살이 실제 있었다 해도 게릴라전 양상이었던 당시 전쟁 특성상 방어를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탄씨 진술이 왜곡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탄씨와 함께 살아남은 삼촌 응우옌득쩌이(83)씨가 답답한 듯 말을 보탰다. “우리는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불법이 아니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베트남전 당시인 1968년 2월 12일 중부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왼쪽 세 번째)씨가 12일 디엔반현 자택에서 한 주민(맨 왼쪽)에게 한국 법원 1심 판결 승소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탄씨 왼쪽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김남주 변호사, 오른쪽은 학살 목격자이자 탄씨의 삼촌인 응우옌득쩌이씨, 맨 오른쪽은 민변 박진석 변호사. 두 변호사는 이날 원고 탄씨에게 1심 선고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자택에 방문했다. 디엔반=허경주 기자
 

”그럼에도 나는 책임 묻기를 멈추지 않는다”



진실 규명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지난해 8월 원고 당사자 심문을 위해 한국 법정에 섰을 즈음 탄씨는 "여기까지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탄씨를 끝내 돌려세운 건 진실은 언제나 드러난다는 믿음이었다. 탄씨는 2시간 인터뷰하는 동안 ‘진실’(Thật·턱)을 15차례 입에 올렸다.

한국인들에게 고통받은 탄씨에게 힘을 준 건 또 다른 한국인들이었다. 청룡부대 출신 참전군인 류모(77)씨와의 만남은 큰 위로가 됐다. 류씨는 2021년 11월 탄씨가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변론기일에 출석해 탄씨의 편에서 증언했다.

탄씨는 "지난해 8월 만난 그분이 내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고 말해 줬다"며 "그가 용기 있게 사실을 증언한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한베평화재단을 비롯한 단체와 활동가 이름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혼자였다면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재판부는 탄씨의 청구액(3,000만100원)보다 많은 4,000만 원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민사 소송이라 탄씨는 청구 금액에 지연 이자를 더한 금액만 배상받을 수 있다. 탄씨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액수다. 탄씨는 “돈에는 큰 관심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떠한 판결도 탄씨의 한을 풀어줄 순 없다. 탄씨가 잃은 가족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탄씨가 가는 길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 국방부는 항소를 검토 중이다. 그래도 탄씨는 끝까지 씩씩하겠다고 했다. "한국 정부에 책임 묻기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피고 대한민국’이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디엔반(베트남)=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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