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24.01.10. 오전 9:22
■ 미국영화는 ‘실명’ 쓰는데 한국영화는 ‘가명’…왜? 美 게임스탑 사태 담은 ‘덤머니’ 헤지펀드·CEO 실명으로 등장 前대통령·일반인 등 성역 없어 영화‘서울의봄’ 전부‘가명’써 명예훼손 소송 등 부담감 높아 실화 제작 ‘가이드라인’도 한몫 영화 ‘덤 머니’(17일 개봉)는 개미투자자들이 수조 원을 휘두르는 월스트리트 헤지펀드사를 파산에 이르게 한 ‘게임스탑’ 주가 폭등 사태를 영화화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실화를 바탕으로 함’이란 자막을 당당히 달고 나온다. 아울러 당시 개미투자자들에게 물먹은 헤지펀드사와 CEO의 실명이 그대로 나온다. 아무리 실화 기반 영화라지만, 한국 정서론 걱정이 든다. “저렇게 실명 그대로 써도 문제가 없나?” 반면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엔 누구의 실명도 나오지 않는다.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뿐 아니라 수많은 군인 캐릭터들은 실존 인물과 일대일 대응이 가능할 정도로 관객에게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시절 역사에 무관심했는데 영화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됐고, 화가 났다”는 20·30대의 고백이 줄을 잇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영화엔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이라는 공언 대신 ‘실화를 모티브로 창작했고, 등장인물 및 구체적 사건은 상상에 기초해 각색됐습니다’란 단서가 달려 있다. 당초 김성수 감독은 전직 대통령만큼은 실명을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었고, ‘전두환’은 ‘전두광’이 돼야만 했다. 김 감독은 인터뷰에서 “처음 시나리오는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인물들의 이름을 바꾸니까 좀 자유로워졌다”고 설명했다. 다만 영화는 마지막에 전두광과 하나회 일당이 쿠데타 성공을 자축하는 사진과 실제 신군부 세력이 그날 찍은 사진을 오버랩하며 이들을 분명히 ‘박제’시킨다. 김 감독은 “상상력을 펼쳐 만들었지만, 영화를 마무리할 땐 다시 이 영화를 시작할 때로 돌아가 현실과 영화를 견주고 싶었다”며 “그들이 남긴 승리의 기록이 부끄러운 사진이 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영화에 실존 인물이 ‘있지만 없는’ 아이러니가 생긴 배경엔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보장받는 미국과 달리 한국엔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공포심이 팽배하다는 점이 자리한다. 실제로 영화 관계자들에게 경각심을 초래한 사건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사람들’(2005년)은 개봉하기 전부터 송사에 휘말렸다. 블랙코미디란 장르 특성상 영화 속 인물들이 다소 희화화돼 그려졌는데,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는 영화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박 씨는 “실존 인물을 영상표현물로 재구성할 때 인격권 침해나 명예훼손이 되는 허위사실을 적시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세 장면을 삭제한 뒤 상영하라고 결정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2019년에 낸‘실화 기반 영화 제작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실명 쓰기’를 멈칫하게 만든다. 가이드라인은 “최대한 특정 인물이 연상되거나 그 인물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도록 실제 사실과 인물의 특징을 각색해 영화에 반영하도록 한다”며 “반드시 상영 전후에 ‘인물, 지명, 상호, 회사 단체 및 사건과 에피소드 등이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임을 자막으로 명시해 게시해야 한다”고 했다. 제작사 입장에선 개봉하기 전에 법률 분쟁에 휘말리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원하는 시기에 개봉을 못 할 수도 있단 위험을 감수할 제작사는 더욱 없다. 실화 기반 영화를 만들면서도 제작사들이 ‘실화’ 이전에 ‘창작물’임을 강조하며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남산의 부장들’(2020년)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김규평’(이병헌 분)이 될 수밖에 없었고, ‘서울의 봄’이 실명 회피 경향을 이어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미국과 크게 다른 지점이다. 미국의 경우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전직 대통령은 당연히 실명으로 등장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명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등장하는 ‘프로스트 vs 닉슨’이나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암살을 소재로 한 ‘JFK’, 딕 체니 전 부통령이 등장하는 ‘바이스’가 대표적이다.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의혹 폭로를 영화화한 ‘그녀가 말했다’나 로저 에일스 전 폭스뉴스 회장의 성희롱을 폭로한 ‘밤쉘’ 등 일반인에게도 성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정우 기자(krusty@munhw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