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는 조용히 강하다. 2005년 처음으로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뛰어든 이후 줄곧 '수익성 우위의 질적성장' 기조를 유지하며 성장을 도모해왔다. 하지만 글로벌 전기차 시장 성장둔화가 예측되는 가운데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 시점에서 삼성SDI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가늠해 본다.
노자의 가르침 중에는 "광이불요(光而不耀)"라는 말이 있다. '밝게 빛나되 너무 눈부시지 말라'는 이 뜻은 성장을 저해하는 과욕과 조바심을 늘 경계하며 착실히 내실을 쌓으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삼성SDI의 경영 전략과도 닮아있다.
삼성SDI는 요란스레 과시하지 않았다. 다만 성장세만큼은 확실했다. 2013년 990억원 수준이던 삼성SDI의 전기차 배터리 부문 매출은 2023년 4조9983억원으로 확대되며 불과 10년 만에 5000%에 달하는 매출 신장을 이뤘다. 초격차 기술 경쟁력과 우수한 품질을 바탕으로 올곧게 '수익성 우위의 질적 성장'을 추구한 결과다.
LG·SK 덩치 키울 때 삼성 어땠나
배터리 사업은 조 단위 대규모 선제 투자가 필수적이다. 완성차 업체들은 각 배터리 업체들의 기술 수준과 투자 여력을 판단해 대규모 물량을 우선 발주한다. 이를 수주한 배터리 업체는 공장을 세우고 요건에 부합하는 배터리를 만들어 납품해 수익을 낸다. 선제 투자 없이는 대형 수주를 따내고 납품 물량을 확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장 신증설을 통해 생산량을 늘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전략 역시 중요하다.2020년대 들어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본격 개화하자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경쟁적으로 조 단위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은 유상증자, 외부차입, IPO(기업공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외부자금을 끌어모아 글로벌 합작법인 설립에 대거 투입했다. 당장 막대한 빚을 지게 되더라도 중장기적으로 거둘 결실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삼성SDI는 이같은 투자 과속을 경계했다.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이는 현금 수준 내에서 투자를 집행하는 보수적인 기조를 고수했다. 배터리 시장의 외연이 나날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삼성SDI의 성장세는 유독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실제 이 시기 삼성SDI는 수주전에서도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2021년 상반기 기준 삼성SDI의 수주 잔량은 약 260GWh(기가와트시)로 LG에너지솔루션(1200GWh)의 5분의 1 수준에 그쳤다. 후발주자인 SK온(600GWh)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삼성이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큰 뜻이 없는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국정 농단 사태에 휘말려 구속 수감됐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오너 부재로 그룹 전체의 신규투자가 사실상 멈추면서 배터리 사업은 성장동력을 잃은 것처럼 비쳐졌다.
보수적 투자 기조…'캐즘' 접어들며 빛 발했다
삼성SDI가 투자에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삼성SDI는 2018년 배터리 투자를 본격화한 이후 △2020년 1조5719억원 △2021년 2조1802억원 △2022년 2조 6288억원 △2023년 4조3447억원 등 매해 꾸준히 조 단위 투자를 집행했다.연간 설비투자 비용만 6∼10조원에 달하는 경쟁사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약소해 보이지만 비용 자체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이 투자 비용 대부분은 유럽 생산공장과 북미 합작공장 신증설에 사용됐다.
삼성SDI의 보수적 투자 기조는 2023년 전기차 시장의 캐즘을 맞닥뜨리며 빛을 발했다. 캐즘이란 새로운 기술이 대중화되기 직전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하거나 후퇴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미국·유럽의 전기차 전환 정책이 지연되자 완성차·배터리 업체들은 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투자 계획을 늦추는 방식으로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대규모 시설 투자에 따른 재무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실적 직격탄까지 맞게 된 셈이다. 무리한 자금 조달 대신 가용 범위 내에서 안정적인 투자 전략을 이어온 삼성SDI의 경우 상대적으로 외부 변수에 대한 타격이 덜하다. 고금리에 따른 투자 위축 분위기에도 GM·스텔란티스 등과 합작 프로젝트를 발표하기도 했다.
결과는 숫자로도 증명됐다. 지난해 삼성SDI 연간 영업이익율(7.3%)은 LG에너지솔루션(6.4%)과 SK온(영업적자)을 앞질렀다. 삼성SDI가 아직 북미공장이 없어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첨단세액공제(AMPC) 수혜를 아직 받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성과다.
삼성SDI는 지난해 매출 22조7083억원, 영업이익 1조6334억원을 기록하며 2030년 글로벌 톱티어(TopTier) 회사라는 목표를 향해 순항 중이다. 전기차용 P5 각형 배터리의 판매 호조에 힘입어 지속적인 매출성장과 함께 수익성을 제고하고 있으며 미국 신규거점 가동 준비도 차질없이 진행하고 있다.
질적성장론 언제까지 유효할까
'질적 성장'은 삼성SDI를 관통하는 핵심 전략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이 공격적으로 캐파(CAPA·생산능력)를 늘린 후 기술력을 나중에 끌어올리는 '선 양적성장-후 질적성장' 전략을 택한 것과 대조적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캐즘 이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토네이도(Tornado) 시기가 도래했을 때도 삼성SDI의 질적 성장 전략이 유효할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다.
배터리 업체에게 중요한 건 결국 수주 물량이다. 수주 규모는 당장 실적에 반영되지 않고 수년에 걸쳐 꾸준히 반영된다. 완성차 업체가 신차를 기획할 때부터 배터리 업체와 계약을 맺고 몇 년간 부품을 함께 개발한 뒤 비로소 시장에 차를 출시하기 때문이다.
삼성SDI는 공식적으로 수주 잔고를 발표한 적이 없다. 증권가와 관련업계에서는 삼성SI의 수주 잔고를 대략 260조원으로 추산한다. 2023년 연간 매출 기준으로 단순 계산했을 때 약 12년치 일감을 미리 확보한 셈이다. 적지않은 규모지만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지난해 말 기준 수주잔고가 각각 500조원, 400조원인 것에 비하면 그 격차가 크다. 삼성SDI가 빠르게 확대하는 전기차 시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경우 캐즘을 잘 넘기면 그동안 쌓은 막대한 생산능력을 기반으로 초고속 성장이 가능하다. 그간 보수적인 투자를 견지해온 삼성SDI에게 그 정도의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다소 어렵다는 논리다.
삼성SDI 앞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예고한 건 긍정적인 대목이다. 최윤호 대표이사 사장은 이달 열린 인터배터리 현장에서 "올해 삼성SDI 투자 규모를 지난해보다 늘릴 예정"이라고 공언했다.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올해 첫 해외 현장경영으로 삼성SDI 말레이시아 사업장을 방문해 '담대한 투자'를 주문했다.